"시설 첫 가족은 어머니… 또다른 어머니 9명이 생겼죠"

 얼마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웰빙(Well-being)의 바람이 불더니 요즘은 그를 넘어서 ‘어떻게 죽느냐?’하는 웰다잉(Well-dying)이 현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최근 많은 사회단체와 법인들은 노인요양원이나 노인전문 복지시설을 운영해 노인들로 하여금 안락한 노후와 더불어 지난 날의 삶을 정리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준비하도록 돕고 있다.

19번 국도를 타고 장수를 지나 무주로 넘어가는 길. 장계사거리를 지나 약 2㎞ 정도 더 가다보면 길 왼편에 작고 아담한 하얀 건물이 눈에 띈다.

이곳은 지난 2006년 노인전문요양복지관으로 설립된 밀알선교복지원. 이곳은 탁 트인 경관에 장계면이 한눈에 들어오고 건물 뒤에는 수령이 100년은 훌쩍 넘었음직한 큼직한 소나무군락이 병풍처럼 서다.

또 사시사철 형형색색의 꽃들로 장관을 이루고 일년 내내 따스한 햇살이 건물 내부를 관통해 왠지 모를 따스한 느낌을 전해준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에 걸린 9명의 어르신들을 가족처럼 돌보는 따스한 햇살 같은 부부를 만났다.

사연의 주인공은 시설유지비 등 막대한 예산이 소요돼 개인이 운영하기는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한 이러한 시설을 자비로 운영하는 밀알선교복지원의 장대호 목사(65)와 그의 아내 육영희 여사(62). 장대호 목사는 완주군 소양면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됐다.

그러던 중 불연 40대 초반에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된다.

7남매 중 장남이며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장 목사가 생업을 그만두고 어려운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에게 점점 힘겹게 다가올 무렵이었다.

“세상 일에 힘겨워 방황하고 있을 때 존경하던 한 목사님이 ‘목회를 해보는 게 어떻겠나’ 라고 권유하셨어요. 저를 좋게 봐주셨는지 제 성품과 맞을 것 같다면서요. 사실 동생 6명을 돌보며 공부시키고, 두 아이를 키우던 제가 뒤늦게 신학을 공부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당장 생계는 꾸려가야 하는데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었죠.” 이때부터 장 목사의 무모한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무주군 적성면에 위치한 상곡교회에서 목회를 해온 장 목사는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고향인 소양과 완주군일대와 전주와 무주를 오가며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10여 년간 이동목욕봉사를 이어왔다.

이 시기에 장 목사 부부가 탄 이동목욕차량이 전복되는 등 크고 작은 사고가 이들을 위협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들 부부를 말릴 수는 없었다.

장 목사가 목회지인 무주와 고향인 소양을 매일같이 오가며 이용하던 19번 도로, 장 목사는 현재 복지원이 위치한 곳의 수려하고 탁 트인 풍광과 따스한 햇살에 반해 이곳에 복지원을 세우면 좋겠다는 꿈을 품고 오랜 기간 공을 들인 끝에 마침내 이곳 대지를 구입했다.

“대지는 겨우겨우 마련했는데 공사를 시작할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던 중 우연히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전주의 한 교회 목사님 부부가 찾아와 선뜻 100만원을 건넸어요. 그걸로 공사의 첫 삽을 뜰 수 있었어요. 시작이 반이라고 하잖아요.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이뤄주시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장 목사 부부는 빚을 얻어가며 공사를 진행했다.

시중은행권에서는 돈이 안 되는 복지시설을 개인이 설립한다는 것에 부정적이어서 대출을 해줄리 없었으며 이 때문에 장 목사는 더 비싼 이자를 물어가며 돈을 빌렸고, 공무원 생활을 마감한 아내 육영희 여사에게 매달 100만원씩 나오는 연금과 장 목사 형제들의 힘을 보태 겨우 공사를 마무리했다.

그 이후 장 목사 가족은 이 곳에서 다섯 명의 직원과 함께 어르신들을 돌봐왔다.

지난해까지 목회지인 무주로 출퇴근하던 장 목사는 복지원을 떠나면 떠오르는 어르신들 걱정에 올해 초 복지원에만 전념하고자 시무하던 교회에서 사임했다.

“교회는 제가 떠나도 다른 목사님께서 부임하시면 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어르신들을 위해 장 목사 부부는 복지원 주변의 텃밭에 직접 각종 채소를 재배하고 이를 상에 올린다.

이날도 장 목사는 새로운 채소재배를 위해 텃밭을 다지며 이곳에 계획된 또 다른 계획을 밝혔다.

“제 목표는 이 텃밭 자리에 암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시설을 세우는 겁니다.

치매어르신이나 암으로 고통 받는 환자가 있는 집은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도 커다란 고통을 받고 있고, 이 때문에 가정이 해체되기도 하니까요.” 밀알선교복지원의 수용정원인 아홉 분의 어르신이 가득해야 겨우 현상유지가 가능하다고 소개한 장 목사는 함께 생활하는 어르신들의 건강이 많이 호전돼 보건복지부를 비롯한 관련기관에서 받는 지원금이 줄어도 그 때가 참 행복하다고 말했다.

끝으로 장 목사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어르신 얘기를 들려달라는 질문을 하자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남긴 채 눈시울을 붉혔다.

“사실 저희 시설에 첫 번째로 들어오신 가족은 제 어머니셨어요. 뇌출혈로 거동이 불가능해 소양에 혼자 계시게 할 수 없어서 이곳에 모셨는데 어머님이 소양에 있던 고향집을 팔고 동생들과 상의해 제게 주셨죠. 그것으로 복지관을 지으며 진 빚의 일부를 갚을 수 있었어요. 사실 이곳은 어머님이 지어서 제게 남겨주신 것이나 다름없어요.” 장 목사는 아쉬움 속에 한 분의 어머니를 잃었지만, 오늘도 다가오는 어버이날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9명의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유산인 복지원에서 하루 24시간을 울고 웃으며 생활하고 있다.

(후원문의=063-351-1925, 후원계좌=농협507046-55-002331 밀알선교복지원) /글=김근태기자, 사진=이상근기자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