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3시께 전주시 덕진구 전북대학교 학생회관 옆에 세워진 이세종 열사 추모비 앞으로 50여명이 모였다.

이 열사의 희생을 기리고 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31주년을 하루 앞둔 이날은 이 열사의 희생 31주년을 하루 앞둔 날이기도 하다.

이 열사는 1980년 5월 18일 오전 1시께 전북대 제 1학생회관 인근 땅바닥에서 온 몸이 멍둘고 피투성인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날 학교로 들이닥친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겨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희생을 당한 것. 이 열사는 당시 전남·북 대학 연합체 ‘호남대학총연합회’ 연락책임자를 맡아 대학 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 열사의 사인에 대해 단순 추락사로 발표했다.

이후인 1998년 광주민주화운동관련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이 열사를 첫 5.·18 희생자로 인정하기까지 진실이 규명되는데 꼬박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결연했던 이 열사의 모습은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참석자 모두에게 생생히 전해졌다.

이 열사의 대학 동기였던 김종길(전북대 축산과 78학번)씨는 “민주화를 열망한다는 이유만으로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이 스러지던 모습을 보며 이 열사와 함께 울분을 토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김씨는 “그 해 5월 3일부터 매일같이 5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전북대학교에 모여 민주화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며 “공수부대가 휘두른 개머리판에 머리가 깨지고, 군용 트럭에 실려 가면서도 학생들은 이러한 열망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그러나 이 같이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아직 민주화의 꽃을 활짝 피우지 못한 게 지금의 현실”이라며 “그들의 희생을 생각해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지금 시대의 젊은 학생들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이 열사의 1년 후배라고 밝힌 한 참가자는 “함께 등산을 하고 학교에 도착한 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게 선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며 “이후 착검 상태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들이닥쳤고 선배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고 했다.

참가자들은 비록 이 열사가 민주화의 열망을 가슴에 묻은 채 숨졌지만, 그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송재 5.18 구속부장자회 전북지부 회장은 “이날 추모행사를단지행사로만 보내고 싶지 않다”며 “좀 더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왜 이 열사가이러한 희생을 당해야 했는지 생각하며 우리 후손들에게 보다 좋은 세상을 물려줘야 할 책임이 젊은 청년학도들에게 있다”고 덧붙였다.

조성용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표와 우석대학교 송송이 총학생회장도 “역사는과거의 유물만이 나이라고 생각한다”며 “현 시대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가 더욱 중요한 만큼 우리 모두가 이 열사의 희생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이날추모행사에 참석한 5.18구속부상자회 전북지부와5.18민중항쟁제31주년 전북행사위원회 관계자를 비롯해 정당 및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학생 등은 이 열사가 숨진 채 발견된 현장을 둘러보기도 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을 부르며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고인을 기렸다./박효익기자 whi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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