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야사–임광순 (2003년 1월 23일)










정치야사–임광순 (2003년 1월 23일)

 

2.12총선을 앞두고 민추협이 중심이 되어 만든 신한민주당은 약칭 신민당이라 불러
정통야당의 법통을 잇는다고 선언했다.

민추협 공동의장이었던 김영삼의 휘하에는 김동영 최형우가 관우와 장비처럼 버티고 있었고 당시 신민주전선주간을 맡고
있던 나는 기자들에게 ‘좌(左)동영 우(右)형우’라는 표현으로 그들의
역할을 소개했다.

동아일보에서 맨 처음 해설기사에 이 말을 인용한 것이 오늘날까지 정치적 거목의 중요한 막료를 거론할 적에 흔히
쓰이는 정치 용어가 되었다.

김동영은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최형우는 문민정부의 막강한 실세로 등장했다.

좌(左)동영이 고인이 된 후 홀로 남아 사무총장과 내무장관을 역임하며 YS이후까지를
겨냥했던 최형우도 지금은 풍을 맞고 쓰러져 거동과 언어가 불편한 채로 불운의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2003년 1월 18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홀에서는 최형우의 차남 재완군 결혼식이
열렸다.

이날 결혼 식장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부부와 과거 상도동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고 민주당 정대철 최고의원 등 민주
투쟁을 같이했던 동지들의 모습이 보였다.

최형우가 문민정부의 실력자로 있을 때 그에게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안겨준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차남 재완군의 경원대 부정 입학 소동이었다.

아버지로서의 최형우에게 둘째 아들 재완군은 자신의 민주화투쟁 때문에 희생된 아픔 그 자체였다.

최형우가 악명 높은 서빙고에서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을 때 재완군은 높은 열에 들
뜬채 엄마의 품에 안겨 신음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들이닥친 정보요원들은 재완군을 떼어 놓은 채 어머니 원영일을 끌고 갔다.

아이가 열이 내릴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는 어머니의 애절한 읍소는 무참히 짓밟혔다.

이 때의 병상이 원인이 되어 재완군은 지각에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이를 알고 있던 이유형이 주선을 해서 경원대에 입학시켰던 것이 언론에 보도되고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민주봉(民主峰)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이었다.

서슬이 퍼런 계엄하의 어느 날 밤, 산외 우거에서 나는 아이들과 한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자정을 넘기면 결혼기념일인 1월17일인 이날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후레쉬 불빛이
번뜩였고 ‘불을 켜라’는 소리가 우레처럼 들렸다.

검은 군장의 합수단원들이 나를 잡으러 온 것이다.

전주에서 역시 끌려 온 김제의 장을규선배와 함께 이른바 ‘남산’의
손님이 되어 있었다.

정균환의 고창 지구당 창당대회에 참석해 ‘박정희와 전두환이가 총칼로 우리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의 이념이요, 목표인 민주주의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라고 연설한 것이
현직 국가원수 모독 비방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나를 잡드리하던 조사원이 아닌 다른 요원이 방으로 들어왔다.

“야 ! 장을규가 너희 선배가”

“그렇습니다”

“그 새끼는 춘하추동을 한꺼번에 입고 다니냐, 몇 대
때렸더니 퍽퍽 소리만 나서 벗겨 보니까 웬 옷을 그리 많이 껴 입었는지 내 참”

그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장 선배는 쏟아지는 매에 동냥아치 뼈가 깨지는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김용호, 장을규 그리고 나는 같은 죄명으로 수도경비사에서 영장이 떨어져 전남북
계엄분소가 있는 광주 전교사로 이송되었다.

전교사 헌병구치소에 도착했을 때 감방장이 아는 체 했다.

“임광순씨 아닙니까”

“그렇습니다만”

“난 박석무라는 사람입니다. 성균관대학 임형택교수 상가에서
뵌적이 있지요”

임교수는 내 집안 아우로 산외 공동에 본가가 있고 그의 부친이 작고했을 때 내가 호상을 맡은 적이 있는데 박석무는
임교수와 광주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각별한 처지에서 문상을 왔다가 나를 본 것이다.

그는 훗날 무안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한 인물로 한학에 정통하고 타성의 족보까지 꿰고 있는 보기 드문 실력자였다.

그 뿐 아니라 알고 보니 집안 형 임천택의 처조카여서 나와는 사가의 연이 있었다.

그 당시 집에는 9순의 조모와 7순의 홀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아들 셋과 딸아이
하나가 있었는데 도대체 어디로 잡혀갔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애비는 어디 갔느냐”고 “병상의 노조모는
자꾸만 나를 찾으시고 남편의 소재를 몰라 애가 타던 어느 날 그 날도 지친 걸음으로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데 유치원에 다녀온 딸이 양지쪽 담장
아래 혼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동무들과 재미있게 뛰어 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봅니다.

아빠는 꽃처럼 살라 그랬죠 아빠는 꽃을 보며 살자 그랬죠’

아내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고 또 울었다.

나는 감방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소인 없는 편지를 썼다.

 

마음에 서린 恨이 지붕 눈을 녹였는가

천정에 맺힌 방울 빗물인가 눈물인가

멀건국에 두부 한 쪽이 구름처럼 떠도네

 

아내는 오늘도 어린아이 달래면서

지아비 있는 곳이 서울인가 광주인가

내 나라 나간적 없건만 있는 곳을 모르네

 

鐵窓 어느 구석 조각볕도 없는 監房

네모진 벽마다에 그리운 얼굴 그려두고

이런 말 저런 이야기 지루한 줄 모르네

 

아흔 살 할머님 일곱 살 채리까지

못 난 나 보곺다??얼마나 졸랐으랴

아내여 네 속에 나 있으나 흔연하게 웃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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