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소년 '멋지게 살자' 꿈 이루다

전주시 사평로에 위치한 전주지방법원. 하루에도 수백 건의 크고 작은 사건과 분쟁이 밀려드는 이곳은 ‘사회적 성공’의 대명사로 오랜 기간 군림해온 사법고시 합격자들로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에서 ‘처마의 빗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點滴穿石(점적천석)’의 마음가짐으로 ‘멋있게 살자’는 자신만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중인 최경섭 변호사(38. 법률사무소 대로)를 만났다.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서 태어난 최 변호사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3년간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당시만 해도 흑산도에서 목포까지는 뱃길로 10시간 거리. 최 변호사의 아버지는 몸이 아픈 어린 아들 덕에 그 멀고 먼 거리를 3년간 매달 오고 가야 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그에게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며 여느 부모들처럼 ‘공부 해라’, ‘성적이 이게 뭐냐’는 잔소리나 꾸중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목포에서 학교를 다니던 중학교 2학년 때. 그의 평범했던 삶을 바꾼 첫 번째 사건이 찾아온다.

성적이 중위권을 맴돌던 그가 반에서 1등 하는 친구의 답안지를 커닝해 반에서 2등이라는 아무도 믿지 못할 성적을 받게 것. 남들에 비해 강한 집념과 자존심, 승부욕을 자랑하는 그의 성격은 학창 시절에도 한결 같았다.

“선생님들과 반 친구들 모두가 커닝한 것 아니냐며 실토하라고 난리였어요. 그냥 커닝 사실을 인정하고 잘못을 빌면 쉬울 일을 자존심 때문에 절대 아니라고 발뺌했죠. 이게 제 원래 실력이라면서요.”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까지 사라져버린 그는 이미 엎질러진 물, 자존심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난생처음 피나는 노력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달간의 노력은 다음시험에서 5등이라는 성적과 함께 선생님과 친구들을 믿게 했다.

그의 자존심도 지켜줬다.

이렇게 그는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 ‘나쁜 짓’인 커닝을 매개로 노력하면 자존심도 지키고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도 잠시, 질풍노도의 사춘기 고교생이 된 그는 방황하고 세상에 표류하다 크고 작은 잘못과 실수를 하게 되고 그 결과 학교를 자퇴했다.

학교의 보호대상에서 제외됐다는데 왠지 모를 슬픔을 느낀 그는 뒤늦게 후회했다.

‘왜 항상 반성은 이렇게 늦게 찾아오는 것일까?’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 다음에 붙는 말이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날을 반성하고 예전에 했던 노력들을 떠올리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원광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때까지 제 삶의 단 하나의 목표는 단순히 직업을 가져야겠다.

그것도 이왕이면 멋있는 직업을 갖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법대에 간 이유는 그게 다예요. ‘판사나 검사, 변호사가 돼서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 하는 거창한 목표의식은 없었죠.” 이런 그에게 커다란 사건이 찾아온다.

흑산도 비포장도로에서 사고로 어머니를 잃게 된 것. 슬픔에 잠긴 그는 도로포장공사가 지연돼 어머니의 사고로 이어졌다면서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진행했다.

법대생으로서 그저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봐왔던 법전들이 그렇게 아쉬울 수 없었단다.

이어진 은사의 충고는 그를 변호사의 길을 걷게 했다.

“학교에 새로 오신 전정환 교수님께서 강의를 시작하셨어요. 그분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고시생들인데 왜 사법고시 준비를 하지 않느냐며 꾸중하셨어요. 그래서 찾아가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죠. 그리고 곧장 신림동 고시촌으로 올라갔죠.”  ‘멋지게 살자’는 그의 꿈은 그를 피나는 노력으로 이끌었다.

낙방이나 실패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노력했고 결과물은 1년 만에 돌아왔다.

사법고시에서 전체 7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것. 그는 사법연수원을 거쳐 서울에서 2년간의 변호사 생활을 했다.

그 2년 동안 평균 퇴근 시간은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 개인적인 여유조차 없이 바쁘게 보냈지만 그는 ‘멋있게 산다’는 것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알게 됐다.

최 변호사는 은사인 전정환 교수의 권유로 지난 2007년 전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5년간 우리 이웃들의 억울함을 대변해왔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사람을 기다리는 직업이고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직업입니다.

제가 변호했던 어떤 분은 모두가 범죄자로 낙인을 찍고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요. 이미 증인도 확실한데다가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인 범죄와 관련돼서 변호사들도 그 사건을 맡기를 꺼려했었죠. 그런데 그를 접견하고 집에 왔는데 ‘자신은 절대 아니라며 서럽게 울던 그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찾아가 귀를 기울였죠. 귀를 열고 들어주니 믿음이 생기더군요. 결과적으로 그분은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됐고요.” 이렇게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한다.

매년 한 차례 이상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고, 철인3종 경기(트라이애슬론) 대회에 참가하는 등 소문난 괴짜이기도 한 그에게는 최근 ‘멋있게 살자’는 것 이외에 새로운 꿈이 생겼다.

“꿈으로만 그칠 수 있지만 폐쇄적인 법조계를 변화시켜 젊은 변호사들이 자기의 역량을 펼쳐 보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변호사가 많아진다고 사건이 많아질 수도 없고 많아져서도 안되니까요. 각자 주어진 일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법률사무소의 문턱도 한결 낮아질 거라 생각해요.” /글=김근태기자·사진=이상근기자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