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한인사회의 개척자인 재 핀란드한인회의 황대진 회장(71)이 전주를 방문했다. 황 회장의 이번 방문은 지난 2008년 세계한인회장 대회 참석을 위해 내한한지 꼬박 4년 만으로, 대구교육청의 초청을 받은 핀란드 현지 직업학교 교장과 국제담당 교사 등 5인을 인솔해 한국을 찾은 것이다.

황 회장이 짧은 한국일정을 조율해가면서까지 이곳을 방문한 것은 그의 고향 전북을 핀란드 현지에 알릴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것. 그가 지나온 개척자로서의 삶을 들여다본다.

지난 1942년 익산에서 태어난 그는 전주공고와 경희대에서 태권도선수로 활약했다. 특히 혈기왕성하던 22살 무렵에는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등의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거쳐 은퇴 후 인천선인중고와 동산중고 태권도 교사로 태권도 전국대회 단체전에서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등 지도자로서도 성공적인 시기를 보냈다.

황 회장의 인생 2막은 그가 한 여인의 남편이자 두 아들의 아버지였던 서른 여덟의 나이에 찾아왔다. 그에게 남들이 가보지 못한 곳을 향한 개척자 정신과 우리나라와 태권도를 전 세계 알리겠다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출신 태권도인으로서의 의무감이 피어 오르게 된 것.

1979년 6월 18일, 그는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는다. 지도자로서 태권도를 널리 알리겠다는 포부 하나만 가지고 핀란드로 떠났다.

“당시 태권도를 전파하기 위해 해외로 나간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을 비롯한 돈이 잘 벌리는 곳이나 가까운 아시아 권으로 떠났어요. 하지만 저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조차 모르는 핀란드를 선택했죠. 이유는 간단했어요.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없어 우리나라에 대해 모를 수밖에 없는 그곳에 한국을 알리겠다는 것이었죠.”

그는 비행기를 타고 파리에 도착한 후, 차를 타고 스웨덴에, 다시 배를 타고 핀란드 남쪽해안가에 위치한 수도 헬싱키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여정을 감내했다.

“핀란드에 아는 사람도 없고, 수중에 돈도 얼마 없던 제가 그곳에 도착한 후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무작정
택시를 타고 가장 싼 호텔로 가달라고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헬싱키 중앙역부근 허름한 호텔에서 그의 인생 2막은 시작된다.

“단 며칠간 그곳에 묵으며 현지사정을 파악하는데 이미 가져간 돈이 바닥이나 수중에는 300불 정도밖에 없었죠. 그래서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근처 스포츠 센터를 찾아갔더니 가라데 수업을 하고 있더군요. 그때 알았죠. ‘아! 태권도도 되겠구나.’”

황 회장은 향후 계획을 구상하며 샌드백을 앞에 두고 태권도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한 핀란드 학생이 태권도라는 것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 학생이 미국을 유학하던 중 태권도를 본적이 있었던 것.

“수중에 있던 돈도 다 떨어지고 당장 지낼 곳도 변변치 않았던 저는 다소 친근해진 그 학생에게 제가 핀란드에 온 이유를 말하고 부모님을 만나볼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죠.”

그렇게 황 회장은 수도 헬싱키에서 50㎞정도 떨어진 카르킬라에 가서 학생의 부모를 만나 ‘나는 이곳에 태권도를 보급해 핀란드 스포츠를 발전시키고, 한국을 알리기 위해 왔다’라고 소개했다.

학생의 부모는 먼 이국 땅에서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찾아온 이 남자의 잠자리를 위해 작은 아파트를 내어주고, 지역신문에 소개될 수 있도록 인터뷰도 주선해줬다. 또 가까운 학교체육관을 주 2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움도 줬다.

핀란드의 기나긴 여름휴가기간이 끝나자 그는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온 10명과 함께 핀란드태권도 역사의 시작을 알린다. 얼마 후 헬싱키에도 두 번째 태권도 도장을 문을 열었다. 세 번째 태권도 도장이 문을 열자 핀란드 태권도 연맹도 구성했다.

하지만 비자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노동허가가 나지 않아 관광비자를 3개월마다 갱신해가며 버텼다. 이마저도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노동청장을 직접 찾아가 설득했다.

‘난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다. 핀란드에는 현재 태권도라는 스포츠도 없고, 그것을 가르칠 지도자도 없다. 내가 하겠다. 태권도는 머지않아 올림픽 정식종목이 될 것이다. 내가 알리는 태권도가 핀란드와 한국 양국간의 우호증진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시만해도 핀란드인들은 북한은 알아도 남한은 어디에 붙어있는지조차 모르던 시기.

노동청장은 황 회장이 ‘외교관도 아닌데 그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품고 노동허가를 유보했지만, 얼마 후 핀란드의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신문사인 헬싱키신문에 소개된 ‘먼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온 한 남자’가 태권도 보급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기사 내용을 보고 정식 노동허가를 발급한다. 홀로 핀란드로 떠난 지 2년 만에 한국에 있던 아내와 두 아들도 핀란드로 들어왔다.

이후 그가 창설한 핀란드 태권도 연맹은 핀란드 체육회와 올림픽위원회에도 가입했으며, 핀란드에는 현재 150여개의 태권도장에서 5만명의 동호회원들이 한국고유의 무술인 태권도를 배우고 있다. 황 회장은 또 핀란드는 물론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발틱3국과 구 소련에도 최초로 태권도를 전파했다.

이후 한국인 최초의 핀란드 시민권자가 된 황 회장은 지난 1991년 12월, 12명의 현지 교민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재 핀란드 한인회를 결성하고, 현재 250여명의 한인들의 친목도모 및 문제해결에 앞장서고, 한국과 핀란드 양국 우호의 민간대사 역할을 수행했다.

핀란드에서의 왕성한 정치·사회적 활동과 양국우호증진 등에 대한 공로로 핀란드에서는 2001년 대통령 사자훈장을 시작으로, 2007년과 2008년에는 각각 문화부와 복지부장관 표창도 수여했다. 현지 장관들의 추천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핀란드 3대정당인 중로당의 헬싱키 동부지역 당위원장을 역임하고, 지난 2007년과 2008년 핀란드 국회의원과 헬싱키시의원 선거에 출마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공적인 정착생활까지 그가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문화의 차이. ‘빨리빨리’로 대변되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그에게 충분하고 확실한 준비를 거쳐 전달하는 핀란드의 ‘여유’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는 것.

그는 또 오랜만에 방문한 전주에 대한 안타까움 반, 기대감 반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동양의 전통과 문화를 간직한 전주와 산타클로스 마을로 유명한 핀란드 로바니에미시는 몇 년 전 자매결연을 맺었어요. 당시 로바니에미시에서는 한옥마을을 방문해 산타클로스 마차 퍼레이드를 갖고, 음식문화축제에 와서 행사부스를 마련하는 등 교류에 적극적인데, 전주시는 교류에 소극적인 것이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특히 로바니에미시에는 매년 12월 한달 동안 산타클로스 축제가 열려 전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오는데, 자매결연 도시로서 행사에 참여하면 전주를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다행히 이번 방문 중 전주패션협회가 핀란드에서 한지패션쇼를 하고 싶다고 협조를 의뢰해와 핀란드에 도착하는 대로 추진해볼 생각입니다. 패션쇼와 함께 한지를 이용한 붓글씨 퍼포먼스 등을 마련해 전주종이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핀란드에서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황 회장은 끝으로 다음과 같이 자신을 소개했다.

“얼마 전 뉴욕타임즈의 조사에 따르면 핀란드는 교육과 복지, 정치, 청렴도, 환경, 치안 등 6개 부분에서 세계1위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교육과 정치, 복지 분야가 잘 발달돼 있는데 저는 우리 대한민국도 이 세가지만 잘 갖추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핀란드의 우수한 제도를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우리나라가 가진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핀란드에 알리고 싶은 핀란드 한인 1호이자 민간대사입니다”

/글=김근태기자·사진=이상근기자·편집=류경임기자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