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남선 익산(이리)개통의 뒷이야기

  익산에서는 6일, 철도개통 1백주년을 맞아 성대한 축하행사를 한다. 1912년 3월 6일 전북도내에서는 처음으로 호남선의 익산(이리)과 강경, 그리고 익산과 군산을 잇는 군산선이 개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리’라 함은 원래 익산(益山) 남일(南一)면 이리(裡里)로서 하나의 한촌에 불과 했던 쓸쓸한 곳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쓸쓸한 고장이 일약 전북도내에서는 처음으로 철도가 개통되고 교통의 요충지가 됐을까 그것은 전주와 군산의 일본인들이 서로 철도를 유치하려는 치열한 경쟁에서 ‘이리’가 중간지점이란 지리적 조건에서 어부지리를 취한 것이었다.

  당초 호남선 계획은 충남 연산에서 전주~김제~정읍으로 이미 설계까지 완료되어 착공단계까지 들어 섰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주에서 큰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전주의 박기순(朴基順 註①)을 비롯한 소위 유지급 인사들이 철도의 ‘전주통과 불가’(全州通過不可)를 고집하면서 철도부설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이유는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내용이었다.

  그들이 반대했던 내용을 보면, 만약에 전주 완산동의 용머리고개(龍頭峴)를 기차가 통과하면 전주의 지맥(地脈)이 끊어지며, 지반이 울려서 명당이 흔들린다는 풍수설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전주는 민심도 풍물로 변하여 인재 및 재물이 모두 궁핍하게 되는, 즉 망멸지화(亡滅之禍)를 입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주는 감영으로서 각종 물산의 집산지이며 지방경제의 중심지인데 만일 그렇게 되면 전주 상권의 유통은 큰 변화가 생길 것이며 또 타지의 상인들이 몰려들어 종래의 유통과정과 경제질서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는 필시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당시 호남철도 기성회장 서오순(徐午淳)은 “소위 도청 소재지가 도청 소재지인 전주가 호남선 노선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전주 발전에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관계요로의 인사들을 모아 놓고 설득작업을 벌였다. 또 전북도장관(지사) 이두황(李斗璜)도 열렬히 반동운동을 벌이는 박기순 등을 불러, 철도 유치에 반대를 말라고 달래고 설유를 했다. 그러나 반대파들은 끝내 듣지 않아 이두황은 책상을 치며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듯 전주철도 유치가 물건너 가자 군산지역의 일본인들이 재빨리 강경(江景)에서 대야(지경)를 경유, 김제~정읍으로 빠지는 코스로 해달라고 관계요론에 운동을 벌였다. 이때 군산지역에서 주동적 역할을 한 일본인은 대성식산(大成殖産) 주식회사 즉 농장주 오오쿠라(大倉喜八郞. 註②)란자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어가자 이번에는 전주지역의 일본인들이 나섰다. 전주군 조촌면에 있는 일본 큰 재벌 미쓰비시(三菱)재벌의 동산농사(東山農事) 주식회사가 주동이 되어 논산~삼례~매암리(梅岩ㆍ조촌면)에서 김제로 통하는 코스를 들고 나왔다.

  이에 당국은 이 두안을 검토한 결과 군산쪽의  대야쪽을 통과한다는 것은 예산면이나 기술면에서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전주와 군산의 양측이 주장하는 곳의 중간지점인 이리를 연락지점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호남선 코스가 결정되자, 전북도내는 북에서 함영ㆍ황등ㆍ이리(익산ㆍ부용ㆍ김제ㆍ신태인ㆍ정읍 등 7개 역이 결정 됐다.

  다시 군산지역의 열렬한 운동에 의해 이리~군산간의 24.7Km의 군산선이 신설되어 역은 이리ㆍ오산ㆍ임피ㆍ지경(대야)ㆍ개정ㆍ군산 등이다.

  이리하여 만경강변의 쓸쓸한 시골마을 ‘이리’(익산)는 호남지방에서 일약 철도교통의 요충지로 각광을 받게 괸 것이다. 반면에 명색이 도청 소재지인 전주와 광주는 철도에서 완전히 소외를 당하고 말았다.

  호남선은 당초 1910년부터 11개년 게획으로 충공사비 1252만 6429원(円)으로 추진할 계획이었다. 그러자 이해 8월, 한ㆍ일합방이 되자 일제는 5개년으로 단축 추진하여 1914년 1월 13일 마침내 목포에서 전통(全通)식을 가졌다.

  그리고 호남선이란 명칭은 당초엔 경목(京城~木浦)선이라고 거론됐었다. 그런데 한국농민수탈의 총본영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부총재 요시하라(吉原)라는 자가 소위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와의 술자리에서 “총독각하, 그 철도 이름을 경목선도 좋기는 합니다만, 호남선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 이유는 그 넓고 넓은 옥야천리(沃野千里)의 황금벌판 호남평야를 달린다는 뜻에서 ‘호남선’이라고 하면 좋을 것도 같습니다.”라고 해서 ‘호남선’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시 전주지역의 철도유치운동의 주역은 미쓰비시 재벌 계열의 동산 농사주식회사(東山農事株式會社)이었다.

  특히 이 동산(東山)이란 상호는 ‘동산촌’에 소재해서가 아니라 미쓰비시 창업주 이와사키 야타로오의 호가 ‘동산’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호를 따서 지명을 ‘동산촌’ 또 철도 역명도 ‘동산역’이라고 한 것이다. 일제때 동산농장의 소유토지는 전ㆍ답 합하여 1487정보 이었고, 소작인은 1091명이었다.

  註1) 박기순(朴基順)은 이른바 ‘반 찬판’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는 일제 때 소위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인인사로도 유명하다. 특히 그의 아들 박영철(朴榮喆)은 일본 육사(陸士) 출신으로 러ㆍ일전쟁 때는 일본군 장교로 참전했다. 예편후에는 34세에 익산군수를 거쳐 강원ㆍ함북지사를 지냈다. 또한 일제때 이리에 방송국이 설립된 것은 그가 조선방송협회 이사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註2) 오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 1837~1928) 그는 당초 총포상으로 일본인 실업가이다. 특히 청일ㆍ러일 등 전쟁 때마다 어용상인으로써 군수물자 조달, 수송으로 성공했다. 일찍이 중국ㆍ한국에도 진출하여 대성하여 오늘날 오오쿠라재벌(大倉財閥)을 이룩했다. 당시 일본인으로서 세계적인 플레이보이로 유명했던 그는 한국에서는 군산에 대성식산(大成殖産) 군산농장(전ㆍ답 약460정보)이 있었고 서울 선린상고(善隣商高)는 그가 설립한 것이다. 현재 일본에는 조일생명(朝日生命) 오오쿠라 호텔(동경) 대성건설, 동경경제대학 등이 있다. 그가 선린상고를 설립한 것은 조선통감이었던 이등박문의 권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명은 이등박문이가 지었는데 그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오오쿠라가 본인의 성씨를 따서 붙일 가봐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註3) 이와사키 야타로오(岩崎彌太郞 1834~1885)는 일본 최고의 대재벌 미쓰비시(三菱)의 창업주로서 해운업으로 성공하자 조선(造船) 탄광 생명보험 해상보험 등으로 종합상사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1868년 명치유신 때는 왕실을 존경하고 나아가서는 근왕세력(勤王勢力)쪽에 가담하여 신 정부가 들어서면서 많은 이권을 독점했다. 오늘날에도 미쓰비시는 일본에서 최고의 재벌론 군림하고 있다.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회 회장(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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