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저 사람 없으면 단 한 순간도 견딜 수 없어.” 다소 유치할 수도 있는 이 고백이 달콤하게만 들리는 이유는 고백의 주인공이 바로 88세 이영두 어르신(전주시 중화산동)이기 때문. 이 열렬하고도 무한한 애정표현에 ‘저 사람’인 박순실 여사(85)는 남편을 처음 만났던 16세의 소녀 때와 같이 수줍게 미소를 짓는다.

박순실 여사도 어느덧 이영두 옹과 함께 지난 69년을 살아오면서, 곱디고왔던 손과 얼굴에는 이제는 인자한 주름이 가득 자리했고, 단아했던 검은색의 머리카락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

백발의 두 어르신은 각각 19살과 16살이 되던 지난 1943년 처음 만났다.

당시만해도 연애결혼이나 데이트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고, 두 사람은 부모의 명령에 따라 선을 봐 결혼했다.

부부는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하며 세상 모든 풍파와 부딪혀왔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7명의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냈고, 언젠가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서고부터는 ‘세상의 끝날까지 봉사하며 살겠노라’던 어느 날의 다짐처럼 이웃들을 위한 유쾌한 발걸음을 옮겨오고 있다.

이 노부부를 만나면, 먼저 중국 당(唐)대의 문장가이자 시인인 백거이(白居易)가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長恨歌)’의 그 유명한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의 나무로 태어나면 연리지(連理枝)가 되자’는 구절이 떠오른다.

현종과 양귀비의 이 애달픈 사랑의 약속이 천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야 지켜진 듯, 두 부부는 지난 세월 동안 서로의 부족한 한쪽 날개가 되어 주었고, 가지를 맞닿은 두 그루의 나무처럼 서로 만난 이후에는 국가유공자인 이영두 옹의 한국전쟁 참전과 같은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잠시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나(이영두 옹)는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이렇다 할만한 재산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저 사람(박순실 여사)이 고생을 많이 했지. 나 역시도 농사도 지어보고, 목공소에서도 일해보고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야. 일을 찾아 다니느라 아이들 교육시키랴 전국을 안 다녀본 곳이 없어.” 두 부부는 자신들이 못 배운 것이 한이 돼 자녀들에게 그러한 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일곱이나 되는 자녀를 모두 대학원과 대학원까지 가르쳤다.

이렇듯 두 부부가 일과 자녀들이 교육문제로 인해 이사한 횟수만 따져도 총 49번. “우리 때에야 시골사람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못 배운 것이 한이 되더라고. 물려줄 유산은 없어도 자식들도 우리처럼 마음에 한을 남겨서는 안되겠더라고. 그래서 애들 일곱 모두가 대학교랑 대학원까지 나왔어. 걔들 다 풀빵장수랑 호떡장수 하면서 학교 보냈다니까. 어느 날엔가 둘이서 살림 차린 다음부터 이사한 횟수를 따져보니까 마흔 아홉 번이나 되더라고. 저 사람이 유일하게 정색할 때가 내가 농담 삼아서 ‘50번 채우게 이사 가자’고 할 때야.” 이들 부부는 22년 전인 지난 1990년, 현재 거주하는 전주시 중화산동 선너머공원 뒤쪽으로 이사했다.

그 때부터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저 앞에 공원 있잖아. 선너머공원. 우리가 이리 이사 왔을 때만해도 여긴 소나무밖에 없는 ‘화산공원’이었거든. 이사 와서 우리는 매일 아침 이곳을 청소하고 가꾸기 시작했어. 길도 만들고, 의자도 놓고. 그랬더니 봐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진짜 휴식공간이 됐어.” 두 부부는 이 일을 시작으로 전주시내 경로당과 노인정 등을 찾아 다니며, 자신들이 손수 만든 아이젠과 지팡이, 목침 등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또 판소리를 배운 후, 각종 시설을 방문해 위문공연도 갖기 시작했다.

“내가 노래하면 저 사람이 고수를 맡고, 내가 목이 아파 쉬고 저 사람이 노래하기 시작하면, 내가 북채를 잡고 그래. 우리가 익힌 판소리만해도 쉰 여섯 곡은 되니 레퍼토리가 떨어질 일은 없지. 아직도 잘하는 판소리 선생이 있으면 배우기도 하고, 복지관 같은 데 가서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해.” 두 부부는 이렇게 못 배운 여한을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은 후 하나 둘씩 풀기 시작했다.

현재에도 이영두 옹은 전북대 평생교육원에서 민화(民畵)를 배우고 있고, 박순실 여사는 늦게나마 한글을 공부하고 있다.

특히 이영두 옹은 지난해에는 전북예술회관에서 민화전시회를 열만큼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늦게나마 활짝 꽃피우고 있다.

“비록 우리의 삶은 고단했지만, 이제 남은 생애 동안은 우리가 가진 재주를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 그렇게 욕심을 내려놓으니 우리 마음에 헛된 욕심과 스트레스가 없고, 우리 둘 다 건강히 사는 거 같아. 이제는 둘이서 계속 건강하게, 하고 싶어하는 봉사나 원 없이 하다 가면 좋겠어.” /글=김근태기자·사진=이상근기자·편집=류경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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