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의 수상자는 스위스의 인도주의자이자 사회사업가인 앙리 뒤낭에게 돌아갔다.

앙리 뒤낭은 부모의 영향으로 청소년기부터 빈민촌을 찾아가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힘썼으며, 1859년 사업 목적을 위해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가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솔페리노 격전에서 발생한 수만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목격하고 구호활동을 시작하면서 사회활동가로 변모를 꾀했다.

그리고 5년 후인 1864년 제네바협약을 통해 국제 적십자를 창립하게 된다.

현재 대한적십자사 전라북도지사 회장을 맡고 있는 유)지성주택건설 김영구 회장(73)의 지나온 삶은 적십자를 설립한 앙리 뒤낭의 삶과 상당부분 맞닿아있다.

이는 김 회장이 고교시절 청소년 적십자 단원으로서의 봉사활동을 시작으로 지난 50여년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봉사해왔으며, 성공한 사업가로서 각종 사회단체와 장학재단 그리고 대학 등에 100억원에 가까운 재산을 환원해왔기 때문이다.

전주시 평화동에 위치한 김 회장의 집무실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으레 두 가지에 놀라게 된다.

첫 번째는 집무실에 전시된 그가 받은 대통령 표창을 비롯한 300여 개의 크고 작은 감사패와 공로패들이며, 다른 하나는 성공한 사업가인 그가 30년 이상 사용하고 있는 오래된 의자와 소파, 낡은 사무기구들이다.

이곳에 전시된 수많은 감사패는 그가 얼마나 많은 봉사 및 사회활동을 해왔는지를 보여주며, 오래되고 낡은 가구와 사무기구들은 수십억원을 사회에 환원한 사업가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그의 검소한 삶을 대변한다.

집무실을 힐끔거리는 시선에 이골이 났는지 김 회장이 인사와 함께 첫마디를 건넨다.

“주위에서도 ‘돈 많은 사람이 왜 이러고 사느냐’고 농담 섞인 타박을 하곤 하지만 저는 지금에 만족하고 있어요. 의자나 소파, 그 밖의 것들도 지금 쓰는 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고, ‘바꿀 돈이 있으면 차라리 그 돈으로 봉사를 하자’는 게 내 신념이고.” 1940년생인 김 회장은 일제와 6.25한국전쟁 등으로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경제형편이 비교적 나았던 정읍시 태인면의 한 농가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리고 전주공고에 재학하던 고교시절 청소년 적십자 단원으로 참가했던 한 고아원의 봉사활동에서 봉사에 대한 사명을 발견하게 되고, 그에게 ‘맨발의 사나이’라는 평생의 수식어가 붙게 된다.

“고교시절 RCY단원으로 한 고아원에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게 됐어요. 그곳에서 눈물겨운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게 됐고 평탄하게 살아온 내 자신이 참 부끄러워 졌어요. 고무신조차 신지 못하고 헐벗은 아이들을 보고, 그 자리에서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던지고 졸업할 때까지 양말을 신지 않았어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리라’고 다짐하게 된 것은. 또 훗날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데 힘쓰고 돈을 많이 벌거든 사회봉사 활동에 쓰라’는 유언을 남기셨죠. 그 두 가지가 제가 저 많은 감사패와 공로패를 가져다 줬죠.” 김 회장은 당시 익산에 있던 전북대 농대에 진학했으며,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후 매형의 사업을 도우며 복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국가재건을 목표로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던 시기로, 김 회장은 전망이 좋아 보였던 건축자재 판매회사인 ‘대일기업’ 설립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업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그는 ‘정의로운 사회에 참여해 정의롭게 돈을 벌어 정의롭게 쓰겠다’는 경영 방침으로 지난 45년 간 건축자재 판매회사와 주택건설사 대표 등 사업가의 길을 걸어왔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는 대리점을 얻기 위해 연합철강이나 일신제강, 쌍용양회 등 서울에 있는 큰 회사들을 수십 번씩 찾아 다니는 노력 끝에 대리점을 따냈어요. 아마 젊음의 열정과 의지, 패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또 1982년부터는 아파트 140세대를 분양하면서 본격적인 주택사업에 뛰어들었어요.” 하지만 당시는 종합건설업자만 주택사업을 할 수 있도록 규정된 법령이 있었으며, 그 법령 때문에 일반주택업자들은 수억원에 달하는 프리미엄을 물며 종합건설의 이름을 빌려야만 했던 상황. 김 회장은 뜻을 함께하는 많은 주택업자들과 힘을 모아 전국주택협회와 전북주택협회를 창립했으며, 각 도의 주택면허자 3천여명을 설득한 끝에 ‘주택업자가 5층 이하의 시공권뿐 아니라 고층 시공권도 갖도록 해야 한다’는 법령개정안을 정부에 건의해 승인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둔다.

또 이를 바탕으로 민간주택업자로는 호남지역 최초로 임대아파트 480세대를 짓기도 했다.

김 회장은 또 건설사업과 함께 사회사업과 장학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난 2004년 비례대표로 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이 밖에도 새마을운동 전주시 회장과 전북지회장, 국제라이온스 협회 355-E지구 총재를 역임했으며, 전북애향운동본부 부총재와 각종 장학재단 이사장 등을 맡으며 지역사회 발전과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김 회장은 또 고교시절 RCY단원으로 인연을 맺어 봉사와 나눔의 삶을 살게 해준 대한적십자에서는 현재 전라북도지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유)지성주택건설을 운영하며 건설업자로서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성공한 기업가지만 여전히 자신을 위해서는 작은 금액조차 잘 쓰지 못하고, 우리나라의 어려웠던 시절이 떠올라 외국에 나가더라도 1달러조차 쓰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김 회장. 그저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분야에서 그저 묵묵히 일해 왔을 뿐이라고 겸양지덕(謙讓之德)을 보이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해온 그는 끝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봉사라는 것은 무엇을 위한 봉사이건, 어느 단체를 위한 봉사이건 간에 처음 시작할 때는 참 어색하기 마련이지만 자꾸 봉사하고 길들여지다 보면 나중에는 안 하는 것이 어색해지는 법입니다.

그렇게 꾸준히 봉사를 하다 보면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일종의 보람도 느끼게 되죠. 판에 박힌 말이겠지만, 우리 모두가 잘살려면 사회가 평화롭고 정의로워야 하고, 모두가 행복을 느끼려면 사회가 밝아야 하니까요.” /글=김근태·사진=이상근·편집=류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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