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故 전태일 열사는 열일곱의 나이에 한 봉제공장의 재봉사로 입사한다. 그리고 그는 경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노동자의 인권이 철저히 희생당하던 지난 1970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서울평화시장에서 분신하며 짧은 생을 마감한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자신의 어머니에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달라”는 것. 전 열사의 어머니 故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유언대로 30여년을 노동현장 곳곳에서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다 지난해 9월, 마침내 사랑하는 아들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당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양대 노총과 시민단체 관계자 등은 두 모자(母子)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 모두 전태일이 되자’며 힘없는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을 계속해나갈 것을 다짐했다.

지난 2008년, 3년 임기의 한국노총 전북지역본부 제35대 의장에 취임한 후 연임에 성공해 올해로 4년째 지역본부를 이끌고 있는 한왕엽 의장(49)도 마찬가지다.

한 의장은 취임 당시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노동운동을 전개해 노동자, 서민이 주인이 되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현재도 노동자들의 권익신장과 복지증진을 위해 일하고 있다.

한 의장이 지난 1988년 전주관광호텔 노조위원장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올해로 24년째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자리하게 된 이유는 그 역시도 구시대적이고 주먹구구식인 오너경영 체제하에 낮은 직원 처우와 불합리한 경영시스템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태어난 한 의장은 고교를 졸업한 후 일자리를 위해 서울로 상경한다. 지금은 문을 닫은 상암동 올림피아 호텔에서 근무하며 일류 호텔리어를 꿈꾸던 그를 노동운동가로 이끈 것은 그의 아버지. 혹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올림피아 호텔에서 일하다 입대를 했습니다. 군생활이 끝나갈 무렵, 저는 호텔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 일류 호텔리어의 꿈을 위해 스위스 호텔학교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대를 불과 며칠 남겨두고 집에서 연락이 왔어요. 아버지께서 위암말기 선고를 받아 6개월밖에 사시지 못한다는 거였죠.”

뜻밖의 소식에 놀란 한 의장은 장남으로서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곁을 지키기 위해 제대 후 고향인 전주로 내려와 지내게 된다. 또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가장으로서 마냥 있을 수는 없어 경력사원으로 전주관광호텔에 입사한다.

“1987년 11월에 관광호텔에 입사를 했습니다. 그때 당시만해도 전주관광호텔은 장사가 제법 잘되는 곳이었고, 대략 140명 정도가 함께 근무했어요. 시대적 분위기가 그랬듯 당시 관광호텔은 직원처우도 좋지 않았고, 경영시스템도 불합리했어요. 한 달에 2~30명씩 해고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서울 호텔과 너무도 다른 환경에 이듬해인 1988년, 노동자 처우개선을 위해 노조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등 떠밀려 노조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노조운동가가 된 거죠. 그런데 저를 전주로 돌아오게 만드신 아버지께서는 위암진단이 오진이었는지 20년을 더 사시고 돌아가셨어요. 지금 돌아보면 노동운동을 하라는 하늘의 뜻이었지 싶어요.”

노조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하던 80년대 말, 한 의장은 젊음의 패기가 가득한 20대 노조위원장으로서 노동자 처우개선을 위해 사측과 끊임없는 마찰을 겪게 되고, 이러한 투쟁이 길어지다 보니 결국 자연스레 본격적인 노조활동가로 변모하게 된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이트클럽과 슬롯머신 등 호텔에 주어지던 특혜가 사라지면서 전주관광호텔도 여느 지방호텔과 다름없이 재정악화에 시달리게 되며, 이로 인해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갈 수 밖에 없는 위기를 겪게 된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유일한 고비는 이때였지 싶어요. 더 이상은 안되나 하는 생각에 다시 서울에 있는 호텔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었거든요. 그때 한국노총 전주시지부 사무국장 제의가 들어왔고 시지부 의장을 거쳐 현재 도지부 의장까지 맡게 된 겁니다.”

한 의장은 블루칼라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노동운동이 사회전방위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이제는 계급투쟁적 방식보다는 노동자들의 현실적인 문제와 현장의 노사문제를 위해 타협적이고 합의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수직적 노사관계나 봉건적 소유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투쟁한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말이다.

“예전에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선과 악의 구도였다면 이제는 이해조정의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있는 관은 노사 모두가 관을 신뢰할 수 있도록 중립성과 행정의 일관성을 지켜야 하구요.”

전주에서 태어나 대부분을 전주에서 지내 전북지역 노동자의 삶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한 의장은 노동운동을 하며 소외된 계층에 대한 사고가 바뀌었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한국노총에 소속된 270개 사업장에서 열리는 행사를 찾아 다니다 보니 가족과 친구에 대해 소홀할 수 밖에 없어 쓴 소리도 많이 듣는 편이란다.

“노동운동. 인간으로 살다 보니 계기가 생겼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그 과정에 뚜렷한 소신도 생겨 지금껏 25년 가까이 하고 있는 거죠. 지금은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은 과거 군사정권하에서는 투쟁적이어야만 했었고, 민주화에 일부 공헌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국민과 공감하는 합리적 투쟁이어야만 하죠.”

그는 끝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부의 불균형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어요. 이러한 문제는 근로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장의 교섭권이 각 기업별 노조에 있어 힘있는 노조는 삶의 질이 높아지는 반면, 힘이 없는 노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어요. 단위사업장을 넘어 전제 근로자의 삶을 개선하는 것, 노동지도자를 교육하는 것, 그리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노동운동가로서 제가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글=김근태기자·사진=김얼기자·편집=류경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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