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호 의원(62)이 지난달 3일, 전라북도의회 제9대 후반기 의장에 취임했다.

‘소통하는 의정, 역동적인 희망의회’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앞으로 2년간 도의회 의정을 이끌어갈 최 의장은, 당시 “도민들의 기대가 큰 만큼 무거운 책임감도 느낀다”면서 “도민들의 기대와 열망에 부응하는 의정활동에 앞장서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어떻게 하면 너와 내가 아닌 우리가 되어 더불어 잘사는 전북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경기침체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도민들에게 새 희망을 줄 수 있을까’라는 고민 속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최진호 의장을 만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5개월 전, 지금은 전주시 전미동으로 편입된 완주군 진조리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최 의장은 외아들로서 가족 모두의 귀한 사랑과 엄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최 의장의 아버지는 언제나 큰 사랑을 주시면서도, 어린 아들이 인사성이나 식습관, 웃어른을 대하는 태도 같은 예의범절에 조금이라도 어긋났을 때에는 가차없이 야단을 치고 바로잡았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른 아침에 절 깨워 빗자루를 들려주셨어요. 나가서 온 동네를 쓸고 오라고요. 어떤 날은 ‘그냥 동네 한 바퀴 뛰고 와. 오가며 만나는 어르신들께는 집까지 들릴 수 있게 큰소리로 인사해라’ 그러셨죠. 아버지의 명에 거역할 수 없었던 저는 나가서 청소를 하고, 만나는 어른들마다 큰소리로 인사를 드렸어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아 요 녀석이 지금 동네 어디쯤에 있구나!’ 하고 대번에 아셨어요.” 아버지의 이러한 가르침은 최 의장이 훗날 사업을 시작하고 33년 동안 새벽 4시 이후까지 잠자리에 누워있어 본 날이 없을 정도로 성실한 생활태도와 봉사정신,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인사성 등 현재까지 살아오는 데 큰 원동력이 됐다.

“예를 들면 의정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하다 보면 누굴 만나거나 인사하는 것이 일이거든요. 처음에는 이러한 것들이 다들 어색하기 마련인데, 저는 단 한번도 인사하는 것이 어색했던 적이 없어요. 지금도 ‘내가 그 누구보다 인사 하나는 잘한다’는 자부심도 있고요.” 미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남중에 진학한 최 의장은 집에서 학교까지 25리(약 10㎞)를 매일같이 걸어 다녔다.

당시는 전주시내에 버스가 단 3대뿐이었고, 버스를 타려던 한동안 걸어나가야 했고 버스를 타려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 최 의장의 말에 따르면 가난했던 그 시대, 그가 등·하교하던 거리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고, 자신의 점심도시락은 주로 그들 몫이 될 때가 많았단다.

최 의장은 그들에게 기꺼이 도시락을 내어주고 빈 도시락만 들고 등교할 때가 태반이었다는 것. 그러한 추억을 뒤로하고 전주공고에 진학한 최 의장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몸집이 크고 힘이 좋아, 학교 체육부장을 맡게 된다.

당시는 체육부장이 규율부장을 겸하던 때였고, 주위에는 힘 좀 꽤나 쓴다는 불량한 친구들도 하나 둘씩 늘어났다.

이 때 그를 바른길로 이끈 것도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고등학교에 졸업하자 마자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도록 곧장 서울로 올려 보내셨어요. 제가 혹시나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러 다닌다거나 사고나 치지 안을까 걱정하셨던 거죠. 아버지께서는 제가 보고 싶으셔도 집에 내려오지 못하게 하시고, 언제나 당신이 직접 올라오셨어요.” 최 의장은 제대 후인 지난 1975년, 일본해외 연수생 모집시험에 합격해 기술연수를 다녀왔다.

그리고 일본인 회사에 취직해 일하면서 기계설비와 시설 책임자, 노사협의회장 등을 맡는 등 성실히 일했다.

최 의장의 성장과 함께 회사도 초등학교 화장실을 수세식 변기로 교체하는 사업에서 50개 학교 발주하는 등 성장했다.

최 의장은 건설설비사업으로 눈을 돌려, 총 3만세대의 주택을 공급하는 등 사업가로 변모를 꽤 한다.

그리고 30년 만에 지방선거가 부활돼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가 열린 지난 1991년, 최 의장은 지방선거 등록 마감 3일전 오탄 의원의 권유로 전주시의회 선거에 참여해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나서 올해로 21년째 지방자치의회에 몸담고 있다.

“당시 저는 정치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정치에 대한 꿈도 없었어요. 오탄 의원님의 연락을 받고 만나서, 그때부터 부랴부랴 피켓도 만들고 선거준비에 나서게 된 거죠. 결과적으로는 운 좋게 전북 최다득표로 당선됐고요.” 최 의장은 전주시의회 입성 후 지나온 경험을 살려 곧바로 도시건설 위원장을 맡게 된다.

또 시의회 의원 45명 중 8번째로 젊은 나이에 1표 차이로 의장에 당선되면서 그때부터 내리 4번의 회기 동안 시의회 의장을 도맡았다.

오랜 시의회의장 경력은 탁월한 업무이해도와 추진력 등 그가 앞으로 2년간 전북도의회를 이끌어갈 의장으로서 기대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의장은 동료의원들에게 권위를 내세우거나 명령을 내리는 자리가 아니라 조직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그는, 앞으로 “동료의원에 대한 배려와 섬김, 이해와 양보의 자세로 도의회를 이끌어가겠다”고 밝혔다.

또 소탈한 평소 성격대로 의장에 취임 후 동료의원이나 보좌관, 사무처 직원들보다 청원경찰과 환경미화원들을 먼저 챙기고 격려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비단 의원뿐 아니라 도의회를 구성하는 직원 모두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인식’으로 도민 모두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모두가 ‘내 것이 아까우면 남의 것도 아까워할 줄 알고, 남의 일을 내일처럼 할 수 있다’라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 최 의장은 3년 전, 병원의 진단과는 달리 건강하게 세상에 태어난 외손주를 보는 것을 최고의 낙이라고 말한다.

또 여느 할아버지와 같이 “그 아이가 벌써 나보다 영어를 잘해. 신동이야! 신동!”이라고 말하며 연신 환하게 웃는 영락없는 손주바보다.

그런 그에게 바른 의정활동은 그 아이에게 최고의 선물이자 좋은 할아버지가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치라는 것은 지금도 후회는 안 하지만, 참 잘했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어요. 아들에게도 내가 해왔던 정치와 사업은 절대 하지 말라고 수십 번을 얘기했어요. 사업을 시작한 33년 전부터 늦잠을 자본적도 없고,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내 시간조차 없는 생활을 아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아서죠. 그 이유로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는 싫은 소리를 참 많이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제가 정치를 하는 동안 남에게 다행히 민폐는 안 끼친 것 같아요.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싫은 소리도 안 들고요. 앞으로의 지방의회 활동에 있어서도 깔끔하고 정직하게 임해 마무리를 잘 하고 싶습니다.

지방의회 의원들의 롤모델이 될 수 있도록요. 그 후에는 여기저기 봉사도 하고, 늦게나마 여가도 즐겨야죠. 하지만 지금은 제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제게 지금 주어진 일은 도민이 원하는 도의회를 동료의원들과 어떻게 만들어갈까 하는 것입니다.

”/글=김근태기자·사진=이상근기자·편집=김혜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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