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영화 관객 수가 18일 2억명을 넘어선다. 1억명 시대를 연 2005년 이후 8년 만에 시장이 배로 커졌다.

한국 영화 시장의 규모를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국영화의 흥행성공이다. 1200만 관객을 모은 '7번 방의 선물'을 비롯해 900만 관객을 넘긴 영화가 두 편('설국열차' '관상'), 500만명 이상이 본 영화가 다섯 편('베를린' '은밀하게 위대하게' '숨바꼭질' '더테러라이브' '감시자들')이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좋은 흥행 성적을 기록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억 관객을 바라보는 영화인들의 시선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한국 영화 시장이 몸집을 빠르게 불려가고 있으나 내실을 제대로 다지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작품성 있는 영화가 쏟아지며 질적으로 가장 높은 탑을 쌓았다는 평가를 받는 2003년 이후 한국영화는 퇴보를 거듭했다는 지적도 있다. 속도는 빠르지만 방향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 '표준근로계약서 활용 현황'을 토대로 새누리당 김희정 의원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2012년 1월부터 2013년 9월 사이 개봉한 49개 작품 중 표준근로계약서를 채택한 영화는 한 편도 없었다. 민주당 정세균 의원이 2011년 5월부터 2013년 9월 사이 제작된 영화 57편을 조사한 결과 전체 스태프를 대상으로 표준근로계약서를 채택한 사례는 단 하나도 없었다.

지난 5일 '2013 여성영화인 축제'를 앞두고 열린 영화 스태프의 노동 환경에 대한 토론회에서 나온 사례들은 영화 스태프들 처우의 현주소를 드러낸다.

조감독 정겨운(30)씨는 "3개월 일한 대가로 현금 50만원과 만년필 한 자루를 받은 적도 있다"고 말해 극소수를 제외한 영화 스태프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를 전했다. 제작자 A씨는 "영화 스태프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하기도 하지만 양질의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며 "영화인들 모두가 발벗고 나서야 할 중대한 사안"이라고 짚었다.

제작 중인 영화 '관능의 법칙'과 '국제시장'이 스태프들에 대해 표준근로계약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점이다.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은 탓할 사안이 못된다. 문제는 수직계열화다. 투자사와 제작사, 배급사와 극장을 모두 주무르는 기업의 등장은 영화계를 왜곡하고 있다.

대기업이 투자와 배급을 맡은 몇몇 영화의 스크린 장악은 도를 넘어섰다. 한 편의 영화가 700개가 넘는 스크린을 확보하면서 다양성 영화는 설 곳을 잃었다. 뿐만 아니다. 극장을 찾는 관객의 선택권은 더 크게 침해 받았다.

대기업의 지원을 받아 2500여 스크린의 반을 장악한 영화들이 허다했다. '아이언맨3' 1389개관, '은밀하게 위대하게' 1341개관, '관상'이 1240개관에 걸렸다. '설국열차' 1128개, '퍼시픽림'은 1005개관에서 상영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매출액 또한 소수 대기업 배급사와 극장에게 돌아갔다. 배급사 기준 전체 매출액의 22.1%를 CJ E&M, 15.5%를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점유했다.

독립영화 스태프로 일하고 있는 김모(30)씨는 "힘들게 만든 영화가 극장을 잡지 못해 걸리지 못하는 경우를 숱하게 봐왔다"며 "대기업이 영화계의 공생을 위해서라도 조금 양보를 해줄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영화관이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대형 쇼핑몰이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는 게 바로 극장이기 때문이다. 쇼핑몰마다 대기업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들어서고 있다.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극장은 하나의 유인책"이라며 "극장이 사람을 끌어들이고 그 사람들이 쇼핑몰에서 소비하게 함으로써 돈을 벌겠다는 게 대기업이 극장을 운영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쉽게 말하자면 극장이 쇼핑몰의 호객 행위를 하고 있는 꼴"이라는 것이다. 또 "2억 명이라는 숫자는 우리 영화 시장이 커졌다기보다는 대기업이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풀이했다.

영화를 통해 이뤄지는 담론과 비평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화 관련 잡지가 3종이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씨네21' 하나뿐이다. 생산적인 비평이나 담론이 만들어 질 수 없는 구조다. 영화가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됐다는 비판은 이런 현실에 기인한다.

관객이 늘고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지만 높은 작품성을 갖춘 영화가 쏟아진 2003년에 비하면 질적으로 만족할 만한 해는 아니다.

우리나라 영화계의 가장 충격적인 데뷔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한국형 스릴러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제57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에 빛나는 '올드보이' 등이 빛을 발한 2003년은 한국 영화계의 전성기였다.

관객은 3배 이상 늘어났지만 올해 박스오피스 상위 10위 안에 든 영화를 보면 10년 전보다 나은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1200만 관객을 모은 '7번 방의 선물'이나 900만 관객이 본 '관상'은 10년 전 영화들 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익명을 요구한 제작사 대표는 "질적으로 높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투자사와 배급사, 극장 모두 당장 돈이 되는 작품만 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당장 흥행 성적이 저조하면 일주일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누구도 위험한 작품에는 손을 대지 않으려고 한다"고 전했다.

"좋은 영화가 나오기 위해서는 투자사나 배급사 그리고 관객들 모두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 영화 시장 구조로는 좋은 영화가 나오기 힘들다"고 말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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