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에 체포된 뒤 잔혹하게 생 마감한 학살문건 찾아
일본군에 체포된 뒤 잔혹하게 생 마감한 학살문건 찾아
  • 김근태
  • 승인 2014.03.0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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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출신 항일의병장 5인 서훈신청
보물제1510호(최익현 초상)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직전인 지난 1908년 겨울, 호남의병 연합체인 호남동의단을 조직해 의병대장을 맡은 해산 전수용(1879. 10. 18~1910. 7. 18) 선생은 당시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며 현재까지 도내 대표적인 항일운동 의사로 추앙 받고 있다.

같은 임실 태생인 이석용 선생(1877. 11. 29~1914. 4. 4)은 을사늑약(1905년) 체결에 반대해 1907년 진안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이후 이석용 선생은 진안과 임실, 장수, 남원, 함양, 구례 등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으며, 1912년 겨울 비밀결사인 임자밀맹단을 조직하고 친일파 처단 등을 계획했으나 일본경찰에 붙잡혀 순국했다.

정부는 지난 1962년 이석용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에 앞서 경기도 포천 태생의 최익현 선생은 을사조약 체결 후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규합해 활약했다.

이밖에 전북 출신의 임병찬 의병장과 대전 출신의 김동신 의병장도 전북지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항일투사로 인정받고 있다. /편집자주  

▲ 진안읍내에 사는 김진명(44세)의 병을 체포한 후 (도주를 꾀해) 목을 잘라 죽였다는 문건(진중일지, 1907년)

최근 일본의 독도 영유권 분쟁 시도와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망언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전북출신 항일의병장 5명을 비롯한 항일투사 259명에 대한 문건이 공개됐다.

특히 이 문건은 대표적인 항일운동인 3.1만세운동을 기념하는 3.1절 직전에 공개된 것이어서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항일투사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추모의 행렬도 줄을 잇고 있다.

정재상 경남 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경남독립운동 연구소장)은 지난달 정부에 전북출신 항일의병장 5명을 포함한 의병장 41명에 대한 서훈을 신청하고 명단을 공개했다.

▲ 하동문화원 정재상 향토사연구위원장이 서훈 신청한 항일의병장 41인의 자료

이번에 공개된 명단은 정 위원장이 구한말 을사늑약(1905년) 이후인 지난 1907~1909년 국내에서 50~400여명의 의병대를 조직 숱한 무장투쟁을 벌이다 일제의 ‘남한 대 토벌 작전’ 때 체포돼 순국한 항일의병장 41명과 무명항일투사 218명의 문건을 찾아 공개한 것이다.

향토사학자인 정 위원장은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일제가 작성한 ‘진중일지’(토지주택박물관 소장)와 ‘폭도에 관한 편책’(국가기록원), 그리고 ‘조선 폭도토벌지’ 등에 기록된 전북출신 항일의병장 5명을 포함한 의병장 41명과 무명항일투사 218명의 학살문건”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번 문건에는 일본군에 체포된 후 칼에 찔려 잔혹하게 생을 마감한 전북 장수 출신의 박재근(朴在根) 의병장과 목이 잘려 순국한 진안의 출신 김진명(金辰明) 의병장 등이 포함됐다.

또 강원도 태백에서는 일본군의 칼에 찔려 한꺼번에 50명이 학살당했다는 내용의 문건도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해산 전수용 의병장-독립기념관 자료

정 위원장은 “이번 문건에 드러난 의병장의 학살은 ‘도주를 기도함에 죽였다’고 상부에 보고했다”며 “일제가 항일의병장을 죽이는 명분으로 모두 도주라는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표현을 쓰며 항일투사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에 찾은 41명의 의병장에 관해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에 서훈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미 서훈자로 밝혀졌다”며 “이번 문건은 의병장들의 뚜렷한 항일기록이 있는 만큼 독립유공자 서훈에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정 위원장이 전북출신 항일의병장 5명에 대해 작성한 서훈신청 공적 요지다.

▲ 김진명(金辰明·1863~1907, 진안군 진안읍) 의병장은 을사늑약 이후인 1907년 초부터 전북 진안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해 대일 항전의 기치를 올렸다.

같은 해 10월 19일에는 진안 경찰서와 우체국 등을 습격했으며, 12월 1일 일본군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 끝에 참수형을 당해 순국했다.

▲ 박재근(朴在根·?~1907, 장수군 계북면) 의병장은 1907년 초부터 의병 100여명을 규합해 장수와 무주, 남원 등을 중심으로 덕유산과 지리산을 넘나들며 대일 항전에 임했다.

같은해 12월 27일 장수남방 백암에서 체포돼 28일 동안의 모진 고문 끝에 칼에 찔려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 이내구(李內逑·?~1908, 전주 남문 밖) 의병장은 1907년부터 기삼연 의진에서 이남규(李南奎), 이정섭(李丁燮) 등과 함께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 차례 격전을 벌였다.

이듬해인 1908년 11월 7일 이남규, 이정섭과 함께 체포돼 3명 모두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 마중길(馬中吉·?~1908, 무주군 무풍면) 의병장은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무풍장(茂豊場) 등지에서 의병장 이장춘(李長春) 등 300여명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수 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1908년 5월 16일, 마중길 의병진 30여명은 무풍장 인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조우해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며, 의병대장 이장춘과 포장(砲將) 정원준(鄭元俊), 교련관 마중길(馬中吉), 후군장 권병이(權秉貳), 중군장 신모(愼某) 외 11명이 전사하고 1명이 포로가 됐다.

▲ 안내성(安乃成·?~1909, 재동 계수역) 의병장은 1907년부터 남원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결사항전 했다.

안내성 의병장은 1909년 1월 16일 의병 30여명과 함께 재동(在洞)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동지 5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김근태기자 g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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