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부끄러움










두 가지 부끄러움

 

요즘 네티즌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있다. KBS 아나운서 황정민에 대한 ‘부끄러움’ 논의가 그것이다. 논쟁의
발단은 황씨가 ‘KBS뉴스8’에서 여중생 장갑차 압사사건의 미군 무죄판결과 관련, 국민들의 항의와 시위 장면을 보도하면서 “보기가 부끄럽다”고
말한 것이다. 이에 분개한 시청자들이 비난의 글을 올리면서 무수한 변론과 질타가 이어지고, 황씨는 결국 앵커자리를 한달 만에 반납하고 말았다.


황씨는 본인의 게시판에 사과글을 게재하며 시위에 참여치 못하고 사실보도만 하고 있는 본인의 처지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을 뿐, 대학생들이 쇠사슬로 몸을 묶고 미군영내로 진입해 들어가서 그들의 명확한 의지를 밝히는 모습이 부끄러웠던 것은 아니었다면서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 시청자들은 황씨의 주장을 수용하려는 분위기는 애당초 없고 냉랭할 뿐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온 국민들의 가슴 밑바닥에 깔린 저항 비슷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요즘 시국은 뒤숭숭하다. 대통령 선거를 10여일 앞두고 소파 협정의 개선 필요성을 절감하는 시점에서 여중생
사건의 미군 피의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아 비틀거리며 본국으로 줄행랑을 쳤다. 이로 인해 온 국민은 감정이 상할대로 상한 상태다.

이런 시점에서 헷갈리는듯한 말 한마디가 국민의 폐부를 아프게 찌른 것. 상황에 따라서는 그냥 흘려버릴 만한
말도 듣는 이의 감정여하에 따라 달라지듯 ‘불난 집에 기름부은 꼴’이 돼버린 것이다.

아뿔사! 자신의 의도와 달리 와전되고 나면, 수습을 위한 화급함도 소용없이 사태는 본질을 넘어서기 마련이다.
황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말이란 사람의 감정을 전달하지만 더불어 미묘한 정신적 느낌까지 표현한다. 자신을 아무리 변호한다고 해도 한번 상처받은
민심은 아물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무언가 빼앗기고 살아가는 듯한 심정으로 국민들이 가슴을 웅크리고 있는데, 듣기에 두 가지 이상의
뉘앙스를 풍기는 언어는 오해소지가 충분하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약소국이라는 지위는 자칫 무질서해 보이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부끄럽게 볼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안고 있어, 애매한 말 한마디가 충격의 여파를 몰고 왔는지도 모른다.

개인의 느낌을 한 순간에 정확하게 밝히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말이다. 황씨가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직장을 사임한 만큼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도 이성을 찾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무분별한 비난도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한다.

얼굴 없는 질책과 비난은 한 개인의 험담을 늘어놓기에 알맞다. 허나 이상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공공의 질서는 있다. 그 도덕성에 법의 잣대가 미치지 못한다 해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류경호/ 창작극회 대표 전라북도연극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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