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 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국악인 유지숙이 ‘지명유래와 전설, 그리고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우리 가락으로 담아낸’ 14곡의 창작아리랑을 수록한 음반 발매에 이어 ‘우리 아리랑’ 발표회를 가졌다.

이로써 ‘유지숙은 아리랑이다’라는 명제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이런 명제에 대해 의아해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아리랑명창’, ‘아리랑사람’, ‘아리랑꾼’이란 호칭이 쓰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호칭은 특정 지역이나 아리랑을 한정해서 부르거나 연구하는 경우를 말해왔다.

그런데 유지숙의 이번 발표회는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명제로 규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대략 이렇게 꼽는다.

하나는 프로퍼셔널한 아리랑 레퍼토리화 또는 집중과 선택에 의한 ‘아리랑의 자기화’를 주목하자는 것이다.

이는 아리랑 고장에서 태어났기에 숙명적이거나 당위적으로 아리랑을 부르게 된 경우나 국악인이기에 당연지사로 아리랑 한 두 곡 정도 불러야 하는 무개념적 수용 태도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특정 작곡가(이상균)가 특정 서도명창(유지숙)을 위해, 특정 창자가 특정 작곡가의 정신을 이해하여 14곡의 창작 아리랑을 창출해 냈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의 위촉에 의한 일부의 창작곡 출현 형태와는 전혀 다른 양식이다.

작곡가는 작가정신으로 특정 창자(唱者)를 전제로, 창자는 음악적 이해를 충분히 수행하고 작품을 자기 레퍼토리화 하여 변별되는 것이다.

이는 아리랑이란 장르에서 처음있는 일이다.

둘은 ‘서사적(敍事的) 아리랑’ 장르를 개척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리랑을 ‘서정 민요’로 규정해왔다.

단적으로 2012년 등재된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아리랑의 종목명이 ‘한국의 서정민요 아리랑’(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발표된 14곡은 경기도 지역(8곡), 경상도 지역(2곡), 충남 지역(3곡), 제주 지역(1곡) 대상 민담·지명유래·팔경(八景) 등을 제영적(題詠的)으로 주제화한 작품이다.

이렇게 서사적 아리랑 14곡을 유지숙이 자신의 레퍼토리로 하여 발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이니 대외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셋은 음반 발매와 이번의 발표회가 ‘서사적 아리랑 14곡 완창’이란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다.

완창(完唱)이란 판소리나 가곡 또는 잡가 장르에서의 일 창자에 의해 자신의 법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것을 말하는데, 창작 아리랑 14곡을 한 창자가 자신의 법제(경서도 창법)로 발표했으니 ‘서사적 아리랑 14곡 완창’이란 의미 부여는 결코 과한 것이 아니다.

넷은 작곡자와 창자의 작업에서 시의성과 지속가능성이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작곡자나 창자의 진정성 담보가 전제된 것인데, 따진다면 이런 것이다.

즉, 남북과 중국 3국이 자국 문화재로 등록하고 유네스코 세계인류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아리랑을 이 땅의 예술가라면 자기 장르로 수용하려는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과연 오늘, 이 땅에서 이런 예술가들이 몇이나 확인되는가이다.

이는 어쭙잖은 아리랑의 세계화 논리나 국민통합적 활용이란 세간의 아리랑관을 일소할만한 것이지 않은가? 더욱이 강원도와 북한 지역 아리랑 작업도 이어 간다니 이를 크게 기대할만한 것이 아닌가?다섯은 아리랑의 인류문화유산적 가치 발현이다.

2011년 중국의 아리랑 자국 무형유산 등재와 남북의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등재는 아리랑의 분단과 분열을 세계에 선언한 것이지만, 일면으로는 얼마나 아리랑이 중요하고, 그래서 세계적 보편 가치가 있음을 세계에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3국이 각각의 소유권과 책임이 있음을 알게 했다.

그런데 이를 인정하면서도 남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종주국 문제이다.

과연 3국 중 어느 나라가 종주국이냐라는 제3국의 질문에 객관적으로 어떻게 무엇으로 입증하느냐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작가정신 발현과 장르 확산, 그리고 이상균과 유지숙의 소명의식은 종주국을 입증하는 명징한 증거라는 것이다.

과공비례(過恭非禮)! 결코 작곡가와 명창을 멋쩍게 하지 않으리라 기대하고 믿는다.

아니, 한 아리랑꾼의 지나친 기대감의 표현이라고 비난도 없으리라 믿는다.

우리 국악계에 이런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을 평가하지 않는다면 언제, 누가 또 이런 작업을 하겠는가? 우리 국악계도 진정한 추임새를 하는 풍토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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