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찬 전라북도 건설교통국장

섬진댐은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이다.

90년 전에 만들어진 섬진댐은 일제 수탈의 역사와 두 번의 댐건설, 세 번의 수몰민 이주 등 우리 민족 근현대사의 애환이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섬진댐은 일제강점기, 호남평야의 쌀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1925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동진수리조합을 설치하고 운암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첫 번째 실향을 맞는다.

그러나 운암제는 저수용량이 작고, 두 해 연속 가뭄으로 발전이 중단되자 1940년 발전사측에서 관개와 발전, 홍수조절을 겸할 수 있는 다목적댐을 건설되면서 주민들은 두 번째 실향을 맞게 된다.

그러나 주민이주는 2차 세계대전과 해방, 6.26동란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사업으로 추진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자료를 보면 2개군 4개면 1,455ha가 수몰되고 2,786세대, 19,851명의 이주민이 발생하였다.

문제는 수몰지역의 토지가 일제하에서 98%를 매수하였으나 수몰민들은 사업이 중단된 사이 이 토지를 기반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주민이주와 토지를 제외한 보상, 새로운 농지 확보, 생활기반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화도와 반월 간척지라는 대안을 내놓았으나 간척사업은 섬진댐 준공과 13년의 시차와 원주민의 텃세로 실향의 아픔만 남긴채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1965년 12월 준공식에 참석했던 박정희대통령의 일필휘지로 옥정호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이주민의 아픔은 모두 잠든 듯 했다.

그러나 1969년 대홍수로 운암면 소재지로 이주했던 200여 세대가 물에 잠기게 된다.

이후 섬진댐은 40여년을 만수위선 보다 5미터 낮게 운영하다가 2007년 섬진댐 정상화를 위해 보강공사를 추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세 번째 실향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조상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내주어야만 했던 그들의 심정은 보상금 몇 푼으로 달래질 아픔이 아닐 것이다.

이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은 통일이 되면 갈 수 있지만 우리는 눈 앞에 고향을 두고도 가지 못한다는 실향민의 하소연이 가슴을 울린다.

섬진댐 정상화사업이 마무리 단계이다.

이제나마 수몰의 애환을 안고 살아오던 주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게 되어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낸 듯하다.

새로운 이주단지에는 면사무소와 ,파출소, 보건지소 등 공공시설과 주민쉼터, 작은목욕탕 등이 조성돼 85세대의 주민이 보금자리를 틀게 된다.

우리 도에는 섬진댐 외에도 용담댐, 부안댐 있어 물 걱정없는 풍요로운 고장이지만 그 이면에는 고향을 등진 실향민의 아픔과 그들과 함께했던 공무원들의 애환이 있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벌써 세모다.

이제는 그들의 아픈 가슴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눈물을 닦았던 그들의 주름진 손을 어루만져주고 싶다.

억지로 떠밀렸던 그들의 등을 다독여주고 싶다.

김용택 시인의 싯구처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섬진강이 우리 도의 젓줄이자 고향의 강이기에 지난 시절의 애환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

캐롤송이 울리고 있는 지금, 진솔한 마음으로 실향민 어르신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