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재 언론인

"존, 도와주시오!"

1991년 11월 말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존 메이저 영국 총리에게 다급하게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공산진영의 최고 지도자가 체면도 내팽개친 채 서방국가 원수에게 손을 벌렸다.

메이저 총리는 ‘선진 7개국(G7)’ 의장을 맡고 있었다.

그만큼 상황은 위중했다.

식량을 비롯한 주요 생필품이 바닥을 드러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젖먹이를 둔 부모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어린이들에게 먹일 분유가 동났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소련)은 빠른 속도로 침몰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그로부터 한 달 뒤 서방 진영에 깜짝 선물을 안겨줬다.

고르바초프는 12월 25일 국영TV를 통해 소련 해체를 선언했다.

그는 "나는 지금부터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대통령의 직무를 중단합니다.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은 곧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12분간의 연설을 마친 후 역사의 무대 뒤로 퇴장했다.

그의 말대로 엿새 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사라졌다.

오래 전부터 예정된 파국이었다.

중앙계획경제는 이미 체제로서의 유효성을 상실했다.

자원 배분 기능은 마비 상태였다.

소련이 그나마 오래도록 버틴 것은 원유 덕분이었다.

소련 경제는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소련은 1960년대부터 산유국 대열에 합류했고, 1970년대부터는 천연가스도 수출했다.

석유 수출을 통해 밀을 비롯한 식량과 생필품을 사들였다.

석유는 치명적 유혹이었다.

70년대 오일 쇼크에 이어 80년대 초 이란 혁명의 여파로 유가는 크게 뛰어올랐다.

소련은 횡재를 만났다.

석유만 수출하면 달러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 돈으로 목에 힘을 줬다.

부자가 쇼핑하듯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을 사들였다.

엄청난 석유 판매 수입은 소련의 경제적 수명을 늘렸다.

오일 머니 덕분에 미국과 팽팽한 군비 경쟁을 벌이는 것도 가능했다.

굳이 머리 아프게 계획경제 개선 방안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체제 개혁 노력은 뒷전으로 밀려버렸다.

고르바초프의 전임자들은 이런 상황을 즐겼다.

이들은 경제를 개혁하거나 외교정책을 수정하지 않고도 기존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석유만 팔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유가가 하락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는 운이 나빴다.

1986년 취임 1년 후 국제유가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당연히 석유 판매 수입도 급감했다.

생산을 늘리기 위해 시베리아 석유 생산시설을 풀가동했지만 수입은 계속 줄어들었다.

1980년대 말부터 소련 정부와 공산당 문서에서 '위기'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기'는 '심각한 위기'로 대체됐고, 이마저도 '재앙'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소련은 '자원의 저주'에 빠져버렸다.

석유 자원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경제구조는 크게 왜곡됐다.

석유 판매 수입에 취해 장기적인 경제 발전은 외면했다.

후안 파블로 페레스 알폰소 전 베네주엘라 석유장관은 석유를 '악마의 배설물(Devil’s excrement)'라고 표현했다.

그는 석유 수입이 국가 재정의 경직성을 높이고, 건실한 경제발전의 걸림돌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석유 판매 수입이 늘어나면 국민의 기대치가 높아지고, 정부는 복지 지출 등을 위해 방만하게 재정을 운영하게 된다.

.유가가 하락하면 지출을 줄여야 하지만 국민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 경제는 파국을 맞는다.

그래서 알폰소 석유장관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창설 후 "석유는 악마의 배설물"이라며 "10년 또는 20년 후에는 우리는 석유 때문에 망하는 꼴을 보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석유는 산유국뿐 아니라 수입국에도 '악마의 배설물'로 작용했다.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가 총체적 부실로 드러났다.

석유공사는 캐나다 석유개발회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1조3000억원의 손실을 떠안았다.

모두 국민의 부담이다.

자원 확보라는 미명 아래 '돌격 앞으로'를 외친 결과다.

자원 개발은 장기 프로젝트다.

대통령 임기 안에 모든 걸 해결하려다간 낭패를 볼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주식 투자와 비슷하다.

단기적 흐름에만 매달리면 백전백패다.

장기적 안목 유무에 따라 석유는 '검은 황금' 또는 '악마의 배설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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