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현 선임연구원 전북교육공동연구원

우리들은 일상에서 간혹 다름과 틀림에 대해 혼동해서 사용한다.

구술면접의 경우 이를 잘못 표현하면 떨어질 수도 있다.

방송에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예인이 이를 잘못해 방송 자막으로 정정해주는 경우에 창피한 일이 따로 없다.

내 자신도 이를 잘못 표현하다 딸아이에게 지적당하기 일쑤지만 다른 이의 잘못된 표현에 대해 일일이 지적해주는 것 또한 당사자에게는 무안한 일이다.

이러한 다름과 틀림의 잘못된 혼동에는 틀림을 말할 때 보다 다름을 이야기 할 때 틀림으로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절대적이다.

이러한 이유에는 다름과 틀림의 차이점을 이해 못해서 잘못된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서로에게 다른 점들을 머릿속 깊이 틀림으로 대응하게 만드는 배타적인 관성과 반복된 학습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잡지나 유명한 대형 포탈사이트의 온라인 게임에서 조차 다른 그림 찾기를 틀린 그림 찾기라는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그림의 다른 점을 찾으라는 게임을 하면서도 제목을 통해 틀린 그림 찾기라는 이름으로 반복된 학습을 해왔다.

우리 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다양하지 못하다.

이는 철학의 부재이며 남북 분단 상황이라는 특수한 설정에 의해 서로 다름에 대해 틀리다고 강요돼 왔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일베 논란도 따지고 보면 다름에 대한 일방적인 배타성의 발호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 짓으로 날지만 한국사회의 모습은 진보세력이나 보수세력 구분 없이 심할 정도로 비틀리고 적대적이어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말을 꺼내기도 힘들다.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나쁜 놈이라고 비난하거나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상대를 경멸하는 독선적 태도에는 다름과 틀림을 사전적 의미로는 구분할 수 있지만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의식에서 ‘다름을 곧 틀림‘으로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을에 대한 수퍼 갑질, 비정규직에 대한 폄훼 등 모든 차별이나 특권의식은 다름에 대한 왜곡된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름에 대한 무한한 경계와 차별은 폭력적이다 못해 참극을 빗기도 한다.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마녀 재판이 그러했고 근대사에 있어 나찌즘과 미국 메카시즘의 광풍이 그러하다.

우리사회는 어떠한가? 과거에는 군사권력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인권과 법을 무시하고 고문이 자행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사형을 시키기 까지 했다.

지금 시기에도 정부에 비판적이거나 사회적 약자에 편에 선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낙인찍어 매도하거나 종북몰이를 한다.

진보임을 자처하며 권력에 가까워져서 기득권이 된 사람들도 마찬가지 모습을 보인다.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목소리에 대해 ‘좋은 것’, ‘나쁜 것’을 자의적으로 규정해 비판과 비평을 무력화 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그래서 ‘비판 하던 사람이 비판 받는 것에 대해 익숙치 못하다’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정확하게 따져보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프레임 구도는 다름과 틀림의 비뚤어진 왜곡된 의식과 너무 닮아 있다.

예를 들면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은 좋은 정책, 상대방이 주장하는 것은 나쁜 정책이라는 도식이 그러하다.

심하게는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인물이나 언론에 대해 그냥 ‘나쁜 놈이나 나쁜 집단’으로 규정해 비판적 목소리를 부정하는데 활용한다.

자신들을 따르는 대중들이 비판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 마치 어린 유치원생에게 가르치듯 대한다.

이는 나쁜 놈이 주장하는 것이니 무시해도 좋다는 태도이다.

‘왜 나쁘냐’라고 반문하면 ‘우릴 비판하니까’라고 답한다.

객관식 시험문제처럼 정답인지 오답인지를 구분해 틀림을 말하는 것은 매우 한정적 표현이지만 다름은 정답과 오답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차이점만으로 쉽게 한정되지 않는다.

우린 정말로 개념도 없고 상식도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이 필요하다.

반성이 필요하다.

다름에 대한 예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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