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두다리' 가져간 대신 또다른 삶의 길 허락
멀쩡한 '두다리' 가져간 대신 또다른 삶의 길 허락
  • 김근태
  • 승인 2015.01.29 1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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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살때 소아마비로 몸 불편 "밥값이나 제대로 하겠나" 차가운 시선속에서도 포기 안해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한 한약업사 어느덧 50여년… 이젠 베풀때
▲ '약자를 보호해야 보다 밝은 사회가 될것'이라는 자신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며 장애를 딛고 일어선 동암(東岩)양복규 이사장./김현표기자

 

최근 관객수 1천200만명을 돌파하며 한국영화사를 다시 쓰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 이 영화의 시놉시스(줄거리)는 6.25 한국전쟁 당시 흥남부두 철수를 시작으로 파독광부들의 이야기, 배트남 파병, 이산가족 찾기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꿰뚫는 내용으로, 많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다.
나이 든 관객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주인공인 덕수(황정민 분)의 이야기에 공감하기도 하고, 그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은 경험하지 못한 부모세대의 노곤한 삶의 모습에 경의와 함께 감사를 보낸다.
오늘 우리가 선정한 이야기도 어쩌면 어려웠던 그 시절을 이겨낸 장애를 가진 한 남자의 인생역경 스토리이자, 그를 남부럽지 안은 성공으로 이끈 가족들의 헌신을 담은 스토리다.
/편집자 주

 

‘국제시장’의 배경이 흥남부두와 부산 국제시장이었다면, 이 이야기의 배경은 순창군 동계면 관전리와 전주한옥마을 초입에 위치한 ‘동아당약방’이다.

팔달로가 아직 비포장도로였던 지난 1968년 들어선 동아당약방은 이 글의 주인공인 양복규 학교법인 동암학원 이사장이 스스로 일군 삶의 터전이다.

양 이사장은 현재 전주 동암고등학교를 설립한 학교법인 동암학원의 이사장이자, 동암재활원과 동암재활초·중·고등학교, 전라북도장애인복지관 등을 설립한 사회사업가 등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본업은 지난 50년 가까이 한약방을 운영해온 한약업사다.

일제강점기인 지난 1938년, 순창군 동계면 관전리의 가난한 집안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양 이사장은 이듬해에 아버지를 병마로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힘겹게 자라야 했다.

남편이 네 아이와 가난만을 남긴 채 곁을 떠났으니 그의 어머니의 노고는 여간이 아니었을 터. 게다가 막내 아들인 양 이사장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소아마비를 앓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왼쪽 발에 이상이 생기고 말짱하던 오른발 마저 무력증이 생겨 양 발을 오롯이 사용할 수 없었으니 그 고생이 여간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양 이사장도 그가 어릴 적 가족들이 먹을 밥을 구하기 위해 남의 잔칫집에 소일거리를 하러 거동이 불편한 자신을 업고 가 모진 구박을 이겨내던 어머니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또 때론 타박을 하면서도 호기심 많은 자신을 업고 이곳 저곳을 구경 다니던 형제들과 일가친척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늘은 녹이 없는 자를 낳지 않는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성심편(省心篇)에는 ‘하늘은 녹이 없는 자를 낳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天不生無祿之人 地不長無名之草)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이 됐든 이 땅에 태어나는 것들은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쓰일 곳이 있다는 선조들의 가르침 일게다.

지금이야 조금은 덜해졌다지만 ‘장애’라는 것은 그가 세상에 발을 내 딛을 무렵인 1960년대 후반에는 보편적으로 ‘밥값이나 제대로 하겠어’ 라는 편견 어린 시선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지난 2010년 발간한 자서전의 부제(副題)인 ‘산속에 버려버리라 했던 장애인’만 해도 그 당시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실제 그가 부제로 정한 이 말도 그가 10살이 될 무렵 어머니가 이웃에게 직접 들은 말이기도 하다.

“못 걸어 다니던 아들이 아직도 살아 있느냐? 치료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깊은 산골짜기에 버려버려라.” 이 말은 그간 자신을 사랑으로 돌봐온 어머니의 가슴에는 비수처럼 꽂혔고, 당사자인 그에게는 평생 씻지 못한 회한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두 다리를 쓰지 못한 그에게도 하늘은 앉아서도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을 허락했다.

바로 지난 1980년대 이후에 제도가 폐지돼 지금은 폐지 전 허가를 득한 사람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한약업사라는 직업이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에는 한약방이 없었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가까운 거리조차 이동하기 어려운 그가 배움을 위해 먼 이웃마을 한약방을 찾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다행히도 다른 마을에서 한약업을 하던 故 임용락 선생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집이 소각되자 그가 거주하는 마을로 이주해 약방을 운영하면서 그에게도 배움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 곳에서 그는 ‘약성가(藥性歌)’와 ‘침구서(鍼灸書)’ 등을 배우고, 약작두에 약을 써는 법과 환약을 만드는 법, 약제를 혼합조제해 약봉지를 싸는 법, 약재를 2차 법제(法製)하는 법, 환자에게 침을 놓고, 뜸을 놓는 법 등을 어깨너머로 배우고 익혔다.

그는 “내가 이 일을 택하게 된 것은 취향과 적성보다는 거동이 불편해 앉아서 할 수 있는 찾은 것”이라며 “나에게 살아갈 길이 있게 된 것은 바로 임용락 선생님께서 우리 마을로 오셔서 약방을 하셨기 때문”이라고 회고한다.

 

 


전주에서의 54년, 그리고 ‘동아당약방’

 

전주완산경찰서 삼거리에서 옛 전라감영 터를 뒤로하고 전동성당 쪽을 바라보면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동아당약방’이 눈에 띈다.

이곳은 54년 전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혈혈단신(孑孑單身) 전주로 상경한 양 이사장이 수년간의 노력 끝에 장만한 첫 번째 ‘내집’이기도 하다.

“형님들은 당시 전주로 가겠다는 내 고집에 ‘건강한 사람들도 객지에 나가서 못살고 돌아오는 판에 가길 어디를 가느냐’고 호통을 쳤지만, ‘가서 부딪히다 못하면 죽겠다’는 각오로 사촌누이 내외 외에는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전주에 몰래 왔습니다.”

이후 양 이사장은 처음으로 세를 든 주인집 가족들의 진맥을 봐주고 약을 지어줬으며, 입 소문이 나면서 그를 찾는 손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역시도 사촌누이 내외의 도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온 그가 혼자 밥을 지어먹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당시 20여 일을 토마토와 냉수로만 연명하던 때도 있었단다.

하지만 이 같은 어려움도 잠시, ‘명의(名醫)’라고 소문이 나면서 그를 찾는 손님들이 많아지고 살림은 제법 나아졌다.

아마도 사회적 편견을 이겨내려 낮에 약을 지어간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밤마다 일일이 전화를 걸며 사후관리를 하는 등의 노력 덕분일 터이다.

모든 난관을 딛고 꿈에 그리던 혼례도 올렸다.

거동이 불편한 자신을 대신해 심부름과 수발을 도맡아 할 직원도 고용했다.

또 빈 손으로 전주에 온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고향에 ‘논’을 사고 명절날 집에 들르니 이는 가히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 할만하다.

그 무렵 손님을 빼앗기고, 그의 성공을 시샘한 주변 한약방에서는 ‘양 아무개가 무허가 약방을 한다’고 수도 없이 신고해 그는 결국 정식으로 허가를 받기 위해 한약업사 시험을 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처음 응시한 전북에서 필기시험에는 당당히 합격했지만, 면접시험장에서 그의 외형만을 본 면접관에게 문전박대 당하며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이듬해 이러한 수모를 피하기 위해 멀리까지 찾아간 충북에서의 시험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삼세번’과 ‘삼고초려(三顧草廬)’ 등의 말이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닐까? 양 이사장은 세 번째로 찾아간 지난 1967년 경기도 한약업사 시험에서 편견 없이 시험을 치르고 당당히 합격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8년 빚을 내서 현 위치인 전주시 전동에 ‘동아당약방’을 열고, 꿈에 그리던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이 곳은 이후 전주중앙초 이전과 경기전 회복,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 등 가히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 할 수 있는 전주구도심의 반세기 동안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때론 지역민들의 ‘사랑방’이 되어 줄곧 그 자리를 지켜왔다.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동암(東岩)’, 또 다른 꿈을 이루다.

학교법인 동암학원과 동암고등학교, 동암재활원, 동암재활초·중·고등학교 등은 모두 양 이사장의 호인 ‘동암(東岩)’에서 따왔다.

뜻을 풀이하자면 ‘동쪽에 있는 바위’로, 그가 태어난 집 바로 옆에 위치한 집채만한 큰 바위에서 따온 이름이다.

“어릴적 마을 훈장을 하시던 재종조부님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나더러 마당가 동쪽에 큰 바위를 가르키면서 ‘너는 저 바위 옆에서 태어났으나 장차 호(號)를 동암(東岩)으로 하여라’ 말씀하셨죠. 그 때는 ‘내 신세에 호는 무슨 호’ 하면서 한 귀로 흘렸지만, 고등학교를 설립하면서 그게 생각나 그때부터 호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약방 운영을 통해 물질적인 부(富)를 쌓은 그는 이제 시선을 돌려 배움의 기회가 없던 자신의 지난날을 생각하며 교육사업에, 자신과 같은 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사회사업에 차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학교법인 동암학원을 인가 받아 지난 1980년에는 동암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사회복지법인 동암은 전라북도장애인복지관 부지를 기부 채납 후 지난 1988년부터 현재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이후에도 그는 성인 지체장애인 거주 시설인 동암재활원과 장애인 교육을 위한 동암재활초·중·고등학교를 차례로 설립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장애인 재활과 그들이 ‘밥’은 먹고 살 수 있도록 직업교육 등에도 힘써왔다.

그가 오래 전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동암’이라는 이름은 이처럼 교육과 사회복지 사업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전주에서는 그의 이름은 몰라도 호인 ‘동암’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양 이사장을 대표하는 첫 번째 이름이 됐다.

또 양 이사장은 이를 통해 호암상(봉사)과 자랑스러운 전북인 대상(효열·봉사), 전라북도 사회복지대상 등을 수상하면서 자신의 호인 ‘동쪽의 큰 바위’와 같이 지역사회에 커다란 족적을 남겨왔다.

전북지역 모든 장애인들의 대부(大父)로서 그들의 꿈과 희망, 선망의 대상이 됐다.

입신양명(立身揚名)과 선공후사(先公後私)

양 이사장은 살아오면서 5만여 권에 달하는 고서(古書)를 수집한 수집광이기도 하다.

이는 평소 ‘한문(漢文)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동북아 시대의 중심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니냐”고 항변하는 그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언제나 한결같이 ‘효도를 뜻하는 ‘효(孝)‘자가 자식이 늙은 부모를 업고 있는 모양이듯 ‘한자(漢字)’ 하나하나에 예의범절이 녹아있다’며 한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해왔다.

(어쩌면 이 글에 이처럼 한자를 많이 쓰게 된 이유도 그런 그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도 이를 알리고 싶어 ‘삼강오륜(三綱五倫)’을 학교법인의 교육이념에 담았단다.

그런 그가 ‘삼강오륜’ 외에도 인생의 좌우명처럼 삼고 있는 말이 바로 입신양명(立身揚名)과 선공후사(先公後私)이다.

차례로 풀이하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출세해 그 이름을 세상에 드높이는 것’과 ‘사적인 일보다 공적인 일을 우선시 한다’는 뜻이다.

‘동암’이라는 이름을 높인 양 이사장은 ‘선공후사’의 정신으로 자신이 우리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세운 기관들이 바로서기 위해 힘써 왔단다.

양 이사장은 현재 산수(傘壽, 80세)를 코 앞에 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관들이 반석 위에 설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나는 세상이 어려웠던 시기에 태어나 몸도 불편하고 가산(家産)이 없는 상태에서 자라, 살아온 이야기가 무척 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을 낳지 않고, 땅은 이름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세상에 감사하게도 쓰임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내가 세운 기관들이 바로 설수 있도록 힘이 닫는 데까지 노력할 작정입니다.”

끝으로 양 이사장은 지역사회에 노약자와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보다 따뜻한 시선과 배려를 당부했다.

“요즘은 무언가 사람의 본심(本心)이 해이된 경향이 있습니다.

본심을 지키며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상대를 존중해야 사회가 바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약자를 보호해야 보다 밝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 양복규 이사장

1938년 순창군 동계면 관전리에서 가난한 집안의 4남매 중 막내로 출생
1942년 소아마비 발병
1967년 한약업사 합격
1968년 동아당약방 개업
1976년 ‘건강편람’ 발간
1979년 전주시민의 장 수상(봉사)
1980년 동암고등학교(인문 남 30학급) 설립
1981년 전주시 정책 자문위원(3년)
1984년 전라북도 정책 자문위원(7년)
1986년 중화민국 국립 의학연구소 고문
1987년 ‘건강철학’ 발간
1988년 전라북도 장애인 복지관 개관
1990년 동암재활원 설립
1991년 고서도서목록 편저
1993년 동암재활초·중·고등학교 설립 전라북도교육청 행정 쇄신 위원
1994년 명예 교육박 박사 학위 취득(전북대학교)        
          전북장애인고용촉진공단 자문위원장
1997년 호암상 수상(봉사)
1999년 ‘굴뚝속의 호롱불’ 발간
2001년 전주대학교 겸임교수
2009년 대한한약협회 중앙회 대의원 의장
2009년 자랑스러운 전북인 대상(효열·봉사)
2010년 자서전 ‘산속에 버려버리라 했던 장애인 동암 양복규 자서전’ 출간
2013년 전라북도 사회복지대상 수상

/김근태기자 g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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