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새옷-양말 생기는 날 고기국 유일하게 먹던 날 이웃간 정 두터웠던 설 현재, 해외여행객 공항 북적 구입한 음식으로 제사 지내

▲ 전주향교 김춘원 전교는 한옥마을 주민이 된지 벌써 70년이며, 최근엔 전주시로부터 한옥마을 촌장이라는 직함을 부여받았다. /김현표 기자

“풍요로운 시절이 오면서 윤리와 도덕이 없어진 것 같다.

물질이 풍부해지면서 인성이 사라지고 설의 의미도 많이 퇴색한 느낌이다.”

다가오는 설을 맞아 덕담 한 마디 대신 안타까운 심정이 물씬 담긴 대답이 돌아온다.

전주향교 김춘원(85) 전교의 이야기다.

/편집자주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그에겐 현 풍토가 마음에 들지 않을 법하다.

그의 말마따나 명절 연휴가 되면 해외여행으로 공항은 북적대고 제사상 역시 여행지에서 지내는 시절이 됐다.

평생 예절과 유학공부를 해 온 그로선 용납하기 힘든 처사다.

김 전교는 “예전 명절은 모든 친척이 모여 가정사를 논의하고 조상을 모시는데 전념했다.

요즘은 설이 다가오는데 제사는커녕 해외여행을 가는 시기가 됐다”며 “물질문명에 나만 편하면 된다는 사고방식 때문이다.

형식적으로 음식을 사고 제사를 지내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과거 먹고 살기 힘든 때, 설만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다.

새 신발과 옷이 명절 때에만 생겼다.

고기국도 이 시기에만 먹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와 많이 다른 점이다.

반면 사람들 마음은 오히려 풍요로웠다.

집안의 대소사를 조상에게 기원하는 설날은 새로운 한 해를 알리는 출발이었다.

농사를 지어서 조상에게 바치는 의미도 있었다.

부족한 음식도 서로 나누며 집안 식구간, 이웃간 정이 두터운 시기였다.

행여 부모님이 아프면 자기 몸을 희생해서라도 부모의 건강을 챙기는데 앞장섰다.

가끔 집안 불화로 부모를 학대하는 소식을 들을 때면 변해버린 세상인심에 김 전교의 심기가 불편해진다.

인성교육의 부족함을 원인으로 꼽는다.

또 교육을 소홀히 한 기성세대의 잘못도 한 몫 한다.

그는 “용돈을 안준다고 부모를 때리는 등 어른들 말을 듣지 않는 시대가 됐다.

사회 불신이 만연한 시대인 셈이다”며 “인성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먹고 살기 바빠 아이들 교육에 신경을 쓰지 못한 우리들도 잘못이 있다.

안타깝다”고 말했다.

인성교육의 부족은 공동체의식 상실로 이어진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란 의식이 팽배해진다.

여기에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까지 더해지면서 나만 잘 먹고 잘 산면 된다는 풍토가 자리 잡았다.

서로를 배려하는 상생의 문화가 사라진 셈이다.

그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인정해주는 사회가 돼야 한다.

제사도 형식보다 성심성의껏 모셔야 한다”며 “상생하는 입장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이유론 소학의 한 대목을 예로 들었다.

‘비유선조 아신갈생(非有先祖 我身葛生) 추원보본 제사필성(追遠報本 祭祀必誠)’ 즉 조상이 없으면 내가 태어날 수 없고, 조상에게 보답하려면 제사를 반드시 성심성의껏 모셔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향교는 매주 일요일 학생들을 상대로 인성교육이 진행 중이다.

불신이 만연한 시절, 향교가 담당해야 할 몫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릴 때부터 상생의 교육이 진행돼야 공동체 의식이 풍부한 사회가 될 거란 판단에서다.

어린 시절, 양말이나 새 옷이 생긴다는 이유로 명절을 손꼽아 기다렸다.

마을 어르신들에게 동네 세배하러 다니고 떡과 유과, 식혜 등을 대접받았다.

행여 세뱃돈이라 받게 되면 기쁨은 두 배로 커졌다.

세뱃돈으로 평소 먹지 못했던 과자 사먹던 재미있는 시절이었다.

제사는 큰집서 지냈다.

매우 추운 동네였다.

문고리가 얼어붙은 시절이다.

화장실, 세면대 등 모든 것이 바깥에 있었다.

상에 그릇을 놓으면 상 위가 얼어 미끄러지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도 장손 며느리였던 큰어머니의 고생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부엌도 바깥에 있어 불 때고 밥 짓고 음식 장만 모두 바깥에서 진행됐다.

직접 음식을 만드느라 추운 곳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불평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이 일을 감당했다.

장손집 며느리의 의무감에서다.

당시 장손집 며느리는 ‘사대봉사’를 의무로 여겼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제사까지 모두 장손 담당이기 때문이다.

또 부모공경, 어른공경, 선생공경, 친구의리에 삼강오륜을 지키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불문율로 여겨졌다.

명절이 오면 제사는 겉치레고 여행나들이에 바쁜 우리네 일상과 영 딴판인 셈이다.

“요즘 이런 말을 하면 옛날 사람으로 취급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근본은 같다.

부모가 바뀐 것도 아니고 하늘과 땅이 바뀐 것도 아니지 않는가” 주역의 한 대목인 원형이정(元亨利貞)을 끄집어낸다.

만물이 처음 생기고 자라고 삶을 이루고 완성하는 사물의 근본원리를 말한다.

원은 만물이 시작되는 봄을, 형은 성장하는 여름, 이는 이뤄지는 가을, 정은 완성된 겨울이 해당된다.

또한 원형이정은 인간이 반드시 가져야 할 인의예지를 뜻하기도 한다.

그의 고향은 부안 주산면 신기리다.

해방 후 부안중을 졸업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옥마을 주민이 된 지 벌써 70년이 됐다.

최근엔 전주시로부터 한옥마을 촌장이란 직함을 부여받았다.

주민들과 공동체를 형성하고 슬로시티인 한옥마을을 유지하는 게 주된 임무다.

그는 “예전엔 정부규제로 신축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최근엔 전주시 개발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

참고 견디면 좋은 일이 오더라”며 “시가 후원하고 우리가 앞장서서 슬로시티 지킴이로서 자문역할을 충실히 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이어 “교언영색이란 말처럼 관광객들을 일시적으로 홀리는 정책은 안된다.

슬로시티 정신을 살려 여유 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며 “살아 있는 역사와 한옥마을만의 문화를 보여줄 참이다.

북쇄통시티에서 슬로시티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촌장의 역할이다”고 밝혔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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