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한 것들이 하는 소리 부친 구박에도 머리에 포대기 뒤집어쓰며 소리 배워 소리 공부하는 또래들 천사로 보여 17살때 본격 공부… 대사습놀이 장원 독도국창상 수상하며 국창 반열에 소리꾼은 포기하지 말고 소리

▲ 판소리 집안에서 태어난 한 평생 소리로만 살아온 김소영명창은 소리꾼 배출에 전념하고 있다.

작은 키에 야무진 얼굴, 탁음이 섞인 목소리로 첫 인상이 강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 살아온 인생길을 느낄 수 있다.

판소리 집안에서 태어나 한 평생 소리로만 살아왔다.

그는 이른바 국창이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진행됐던 국창대회에서 당당히 국창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주위의 따가운 눈치도 있었다.

국창이란 호칭이 그리 쉽냐는 것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상을 탄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리를 잘했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상을 받아야 명창이 아니라 소리를 아름답게 하는 게 진정한 명창이란 뜻이다.

아름다운 소리를 풀어가고 있는 김소영 명창의 소리길을 따라가 보자.

/편집자주

 

김소영(62) 명창은 국악집안 출신이다.

전북도무형문화재 홍정택, 김유앵 명창 부부가 고모와 고모부다.

오정숙 명창은 아버지의 막내 이모였다.

어렸을 때부터 소리를 접하며 자란 것은 당연지사였다.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 고모집에 잠시 기거했다.

홍 명창은 당시 전주 청락루라는 국악양성소를 운영했다.

김소영 명창은 이곳에서 가야금, 양금, 칠현금 등을 접했다.

12살 때 본격 소리공부에 들어갔다.

홍정택 명창이 첫 스승이었다.

공부도 잘했지만 타고난 소리집안의 피를 속일 수 없었다.

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했다.

천한 것들이 하는 것이며 딴따라라며 싫어했다.

홍정택 명창과 멱살을 잡고 싸울 정도였다.

심지어 어린 딸의 머리카락까지 잘라버렸다.

하지만 소리공부에 대한 김 명창의 고집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머리에 포대기를 쓰고 소리공부를 하러 다녔다.

무엇이 그를 홀렸는지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란다.

“자나 깨나 그곳만 생각나고, 눈만 뜨면 그곳에 가고 싶어 죽겠는거야. 머리에 포대기를 뒤집어쓰고 소리를 배웠지. 뭐가 좋았는지 소리 공부하는 또래들이 천사로 보일 정도였으니까.” 소리공부 시작한 지 5년 후인 17살 때, 그는 오정숙 명창으로부터 전문적 공부를 시작했다.

이모할머니였지만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스승으로 기억한다.

홍정택 명창과 오정숙 명창의 소리차이도 이 때 알았다.

홍 명창이 남자소리라 힘 있고 경쾌하지만 반면 섬세한 점이 없다면 오 명창의 소리는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인 면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또 오 명창은 연기를 잘해 소리 뿐 아니라 연기공부까지 배울 수 있었다.

뜻하지 않게 일찍 결혼을 하게 된 그는 남편의 반대로 잠시 소리공부를 접었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콩나물 값 아껴가며 배우러 다녔다.

돈이 없어 책도 사지 못하고 받아 적으며 배웠다.

아이들 양육은 어머니가 했다.

낳기만 하고 소리에 미친 셈이다.

“소리에 미쳐서 남편이 반대를 해도 소리만 했다.

부모님은 딸을 믿고 모든 살림을 다 해줬다.

이해를 하지 못하는 남편 때문에 너무 힘들었지만 소리 공부할 때만큼은 너무 행복했다.”

꾸준한 완창발표회를 자신의 저변을 넓혀간 그는 1987년 제13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일반에서 장원에 오르게 됐다.

그의 나이 삼십 세 때다.


기세를 모아 1993년엔 남원춘향제 판소리 명창부에서 장원을 거머쥐며 명실공히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주위의 수많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리 하나에 집념했던 소리인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대통령상을 받게 되니 반대했던 아버지도 적극적 지원자로 변하게 됐다.

정식 소리꾼이란 칭호를 얻게 되니 돈도 벌게 됐다.

여기저기 러브콜이 이어졌고 각종 공연 및 학교 등에서 ‘김소영’이란 사람을 찾게 됐다.

대통령상을 받은 이후 그의 행보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빠졌고, 목이 쉴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갑작스레 얻은 명성 탓일까. 어느 날 뜻밖에 징후가 찾아왔다.

목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주위에선 수술을 권유했지만 소리꾼의 자존심으로 허락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소리를 하며 죽겠다고 결심했다.

소리는 나지 않고 목에선 이상한 냄새가 올라왔다.

지독하게 썩은 냄새였다.

확 소리를 지르는데 밥알 3~4개 정도 덩어리가 목에서 튀어나왔다.

성대를 가로막았던 굳은 살이 튕겨져 나온 것이다.

그 다음날부터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구름이 갇혀 있던 갑갑했던 소리가 빛을 받은 것처럼 쭉 나오는 것이었다.

목도 새고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득음을 이 때 경험했다.

“목이 안 쉬고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다.

포기하지 말고 질러야 된다.

계속하게 되면 목이 나오게 돼 있다.

하면 나오게 돼 있다.

그게 소리꾼의 길이다.

” 그의 소리는 이른바 수리성이다.

동초제 영향을 받아 남성적이고 우렁차며 특히 계면조에 강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타고난 목소리는 청구성인데 혹독한 훈련으로 수리성까지 넘나드는 몇 안되는 소리꾼이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은 일이 2012년도에 생겨났다.

경북 포항에서 진행된 제1회 독도사랑 국악사랑 대한민국 국창대회에서 최고상인 독도국창상을 수상한 것이다.

거금 5,000만원의 상금과 함께 국창이란 훈격을 얻게 됐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훔친 것도 이때다.

이 대회에 참가한 이유가 명창답다.

스승인 오정숙 국창을 비롯해 홍정택, 김유앵 명창이 세상을 등지자 그는 나태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리공부 30년이지만 몸은 늙고 소리는 맘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시험대에 다시 올려놓고 싶었다.

때마침 열린 국창대회에 참가해 뜻밖의 좋은 결과를 얻었다.

아직 시들지 않은 자신의 모습까지 발견하는 기회도 됐다.

그는 상복이 많다.

대통령상을 비롯해 국창이란 칭호까지 얻었다.

하지만 그는 상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다.

상을 받는 게 명창이 아니라 소리를 잘해야 명창이란 게 변함없는 생각이다.

국창대회 참가도 자신의 소리를 평가받기 위해 참가했다.

운좋게 일등을 했지만 아직도 그 때 소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상을 받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리를 소리답게 관객이 울어주고 웃어주고 내 속에 들어와야 명창이다.

내 감정을 전달하지 못하면 명창이 아니다”며 “요즘은 대통령상만 받으면 명창이라 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소리를 모른다.

공부를 하지 않고 안주하는 경향이 매우 심하다”며 아쉬워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지만 소리공부엔 편법이 없다는 게 김 명창의 지론이다.

흔히 노력 90%, 재주 10%라 일컫지만 그는 노력에 99% 무게를 둔다.

노력을 얼마나 하느냐에 결과가 천지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나는 전달해 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나머지는 배우는 사람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며 “편법으로 공부를 하면 소리인생을 짧게 된다.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

후학양성이 중요한 이유다.

판소리 연구소를 통해 소리꾼 배출에 전념하고 있다.

김세미, 천명희, 최영란 명창 등이 그의 뒤를 잇고 있다.

제자들이 대통령상을 받는 게 본인의 꿈이다.

또 ‘내 뒤를 이어 할 일이 있다’는 오정숙 명창과 약속도 지켜야 한다.

건강이 허락되는 때까지 지킬 각오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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