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로 CEO로 현장 누비며 '언론인 50년 외길' 걷다
기자로 CEO로 현장 누비며 '언론인 50년 외길' 걷다
  • 김근태
  • 승인 2015.03.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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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
▲ 언론인 생활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며 자신은 영원한 기자라고 말하는 임병찬 사장

 

전북지역 언론계를 대표하는 원로인 임병찬 전북도민일보 사장(79)은 지난 50년간 언론인으로 종사하면서 해방 이후 전북지역 역사의 현장에 줄곧 함께 해왔다.
그의 발자취가 지난 1960년대 이후 전북의 역사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주MBC 제1기 기자 출신인 그는 지금의 전주-진안간 모래재터널을 있게 한 곰티재 대형교통사고(1966년)와 전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이리역 열차 폭발사고(1977년) 등 도내에서 발생한 유례없는 대형 참사와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현장에서 직접 취재했다.
또 최근에는 지역발전을 위해 언론사 대표와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의 자격으로 새만금 개발과 LH본사유치, 기금운용본부 이전 등 지역의 각종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힘써왔다.
기자로 출발해 CEO에 이르는 30년의 방송사(전주MBC) 생활과 이후 올해까지 20년째 이어져오고 있는 전북도민일보 사장으로 그는 언론인으로서만 50년의 외길을 걸어온 셈이다.
지난 50년 동안 전북의 역사를 현장에서 목도한 임병찬 사장을 만나 고향인 전북의 발전을 위해 살아온 그의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2일 그의 집무실인 전북도민일보 사장실에서 진행됐다.
/편집자주  

 

일제강점기인 지난 1936년 전북 진안에서 6남매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후인 12살 나이에 전주로 유학을 오게 됐다.

종손인 큰아버지에게 아들이 없자 할아버지의 뜻에 의해 양자로 입적된 것. 당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4학년이던 그는 당시 진안에서 전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인 곰티재를 넘어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전주에 처음 당도했다.

당시에는 큰아버지가 전주에서 제제소를 운영해 제법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단다.

하지만 불과 얼마 후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사변이 발발하면서 목재공급이 어려워지고 가세도 급격히 기울었다.

공부를 제법 잘했다는 그는 이후 당시 명문인 전주북중학교와 전주고등학교를 차례로 입학했지만 전쟁 후 고단했던 삶의 무게는 커다란 시련과 고통을 가져다 준다.

중학교 재학 시절에는 육성회비를 제때 내지 못했지만 차마 어려운 처지에 놓인 큰아버지께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시험날 교실에서 쫓겨나는 수모도 겪기도 했다.

며칠 후 교내에서 열린 웅변대회에서 그는 징계를 받을 것을 각오하고 그날의 울분을 토해냈다.

웅변내용은 가난은 죄가 아니며, 학교는 학생들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열심히 갈고 닦는 신성한 배움의 장이라는 것이었다.

이 웅변을 통해 그는 퇴학을 당할 것을 불사하고 자신을 시험장에서 내쫓은 학교를 비판했지만, 학생들의 큰 호응 속에 1등을 차지했고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3년 내내 학비를 면제받는 특혜를 누리게 된다.

고교시절에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병석에 누워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입학과 동시에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3년의 고교시절 가운데 대입 준비를 위한 고3 마지막 6개월을 제외하고 나머지 2년 반을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대학진학의 기대와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단다.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이 않아 더욱 혹독하게 공부에 매진했지만 그 해 대학에 낙방해 좌절을 겪었고, 이듬해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합격했지만 이번에는 대학 등록금 마련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다행히 당시 전주고 교장인 배운석 선생과 전북일보 사장이었던 故 서정상 박사의 도움을 받아 등록마감일 직전에 가까스로 등록금을 냈다.

하지만 서울로 떠나는 그에게는 자신만을 바라보며 고향에 남겨질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이 있었고, 대학 생활을 위해서는 유학자금이 필요했다.

결국 그가 서울에 당도한 것은 국회의원선거에서 돈을 받고 후보 찬조연설을 하고 가족생계비와 서울생활을 위한 여비를 마련한 5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꿈과 희망을 노래하자’

비록 그는 어릴 때부터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지만 그 때의 소중한 경험들은 이후의 삶에 무한한 힘으로 작용했다.

지난날 그의 삶을 지탱해준 에너지는 어린 시절의 고난과 미래를 향한 도전,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대학에 와서도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그에게 당시 서울은 매정한 도시였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인 만큼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중요했지만 스스로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여느 고학생들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

천우신조 끝에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면서 다소 숨통이 트였지만, 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이마저도 끝이 났다.

다른 가정교사 자리를 알아보기도 했지만 전북출신이라는 이유로 문전박대 당하는 일도 있었다.

자신이 전북출신이라는 이유 만으로 문전 박대를 당하고, 그가 서울에서 만났던 식모살이를 하는 사람, 구두닦이를 하는 학생 등 궂은 일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전북출신이라는 것을 알면서 고향인 전북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도 갖게 됐다.

결국 그는 이후 공사판에서도 일을 하고, 당시 암암리에 누드잡지를 팔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했다.

한 번은 대학교 교복을 입고 누드잡지를 팔다가 선배에게 걸려 된통 혼이 난 적도 있었단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 한 그는 다시 전주로 낙향해 아중천 제방을 쌓는 취로사업 공사장의 감독을 맡아 가족들의 생활고를 해결하기도 했다.

그는 그리 녹녹치 않았던 그때의 현실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제는 도저히 길이 없다, 빠져나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절망하지 않은 것은 내가 모든 가족들의 믿음과 희망이 됐기 때문이야. 내가 포기하면 가족 모두가 절망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기대를 꺾을 수가 없었어.”  

 

 

◎…전주MBC 입사,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50년

임 사장은 지난 1965년 당시 민영방송으로는 호남지역에 최초로 개국한 전주문화방송(전주MBC)의 1기 기자로 입사하면서 인생의 대전환기를 맞는다.

이듬해인 1966년에는 8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지금의 전주-진안간 모래재터널을 있게 한 곰티재 대형교통사고를 취재하는 등 기자로서 발로 뛰는 취재를 통해 특종 기자로도 이름을 날렸다.

전북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과 주요 현안들에 대해 현장을 하나하나 찾아 다니며 이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그는 전주MBC 보도부장과 이사, 상무 등을 거쳐 지역방송 출신 기자로는 최초로 여수MBC 사장을 역임했으며, 다시 전주로 돌아와 자신이 입사했던 전주MBC 사장을 맡기도 했다.

여수MBC 사장 시절에는 직원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신 사옥을 건립했으며, 전주MBC 사장 시절에는 신 사옥 건립과 남원MBC 개국, 라디오-TV 송신소를 모악산으로 이전하는 등 CEO로서도 많은 업적을 이뤄냈다.

30년간의 방송사 생활을 마감한 이후에는 지난 1995년 6월부터 현재까지 20년 동안 전북도민일보 사장을 역임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또 장애인먼저전북실천협의회장과 전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적십자사 전북도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역사회를 돌보는 일에도 힘써왔다.

얼마 전에는 자신이 학창시절에 받았던 은혜를 되갚기 위해 지난 1986년부터 30년째 남몰래 사재를 털어 가정형편이 어려운 모교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이는 그가 ‘받은 은혜는 잊지 말고 베푼 것은 잊으라’는 옛 선현들의 가르침인 ‘수혜불망 시혜불념(受惠不忘 施惠不念)’을 지켜 숨겨져 오다 늦게나마 알려지게 된 것이다.

실제 임 사장은 매년 한 명의 학생을 선발해 대학 진학 무렵 자신에게 그토록 필요했던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 교재 구입비, 합격한 대학까지의 여비를 모두 포함한 장학금을 후원해왔다.

이러한 사실은 장학금을 지원받았던 학생들이 어느덧 성장해 임 사장의 아호를 딴 ‘의송회(議松會)’를 결성하고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회비로 릴레이 장학사업에 나서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거울삼아 그 누구보다 ‘한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제때 배우지 못하면 일생의 눈물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북발전에 대한 열망과 애향운동

전북애향운동본부는 지난 1977년 지역사회와 학계, 언론계, 일반 사회단체 등이 모여 설립된 순수 민간단체로, 임 사장은 애향운동본부 창립 초기부터 참여해 지난 2004년부터 현재까지 총재를 맡고 있다.

이런 그와의 인터뷰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북발전과 지역현안 문제 등이 대부분이었다.

참으로 더디게 진행돼온 새만금 개발과 실패로 끝난 LH본사 이전 문제 등으로 시작된 그의 화두는 전북발전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 지역인재 육성, 도민의 결속, 지역균형개발을 위한 투쟁 등으로 이어졌다.

애향운동본부 총재로서 그는 낙후된 전북과 가난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도민들을 위해 국가균형발전의 필요성을 알리는데 힘써왔다.

언론사 대표이자 애향운동본부 총재의 자격으로 정부에 각종 지역현안 해결을 건의하고, 故 김대중 대통령과 故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과 동석한 자리에서 조차 지역 차별에 대한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현재 그는 ‘새만금’이 가장 큰 고민이란다.

앞으로 전북경제를 이끌어나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새만금 개발이 현재까지도 지연되고 있는 것에 대해 큰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새만금 개발 기공은 노태우 정권인 지난 1991년에 됐지만, 25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야. 중국 상해에 있는 푸동지구가 새만금과 같은 시기에 착공에 들어가 1998년에 내부개발까지 완료하고 세계적인 공업단지로 거듭난 것과 비교하면 슬픈 일이지. 지금은 인근 양산도에 세계최대규모의 항만시설을 짓고 있잖아. 반대로 새만금은 본격적인 내부개발은커녕 동서2축 등 주요도로조차 안되고 있어. 이런 것도 참 슬픈 일이여.” 그는 새만금 개발을 ‘속도의 문제’로 정의했다.

전북을 위해서는 새만금 개발이 조속히 완료돼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그 어느 것보다 통치자의 결정과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영원한 기자다’

그는 여든의 나이를 앞둔 요즘도 매일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신문 5~6가지를 훑어본단다.

이후에는 TV를 켜고 뉴스를 시청한다.

신문사로 출근한 후에는 언론사 대표로서 기자들과 같은 심정으로 기획 아이템을 발굴하고,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는 언론인으로서 50년 동안 지내오며 몸에 고스란히 베인 습관 탓이다.

그는 끝으로 전북발전을 위해 언론이 해내야 할 역할과 전북의 희망에 대해 얘기했다.

“내가 기자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전북도민이 250~60만에 달했지만 50년이 흐른 지금은 187만으로 줄었거든, 도세가 약해지면서 전북도 소외와 차별을 겪을 수 밖에 없었어.

이제는 지역언론도 나도, 그리고 도민들도 미래를 위한 도전과 포기하지 않는 정신, 조건 없는 지역발전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해.

특히 지역언론은 다양한 기사를 통해 도민을 결속시켜 의식을 전환시키는데 앞장서고, 도민들과 함께 끝없는 투쟁을 통해 인사탕평 등 지역균형개발을 이끌어 내야 하는 의무이자 숙제가 늘 주어진 셈이지.

평기자로 시작해 CEO가 된 나의 지난날의 삶도 그러했지만 누구든 한 우물을 파면 언젠간 달디단 꿀물을 맛볼 수 있을 거야.

전북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목표를 가지고 끝임 없이 노력한다면 달콤한 결실을 맛볼 날이 오겠지.”  

 

 

■ 임병찬은…

- 전북 진안 출생(1936년 9월 28일)

- 전주북중, 전주고, 고려대 사학과 졸업

- 전주대 명예경영학박사

- 전북대 초빙교수

- 전주문화방송㈜ 상임이사

- 여수문화방송㈜ 대표이사

- 전주문화방송㈜ 대표이사

- ㈜전북도민일보 대표이사(현)

- 장애인 먼저 전북실천협의회장

- 전라북도 사회복지 공동모금회장

- 적십자사 전라북도지사 회장

-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현)

- 전북통합방위협의회 위원(현)

- 새만금추진 전북도민 총연대 상임대표

- 대한적십자 중앙위원(현)

- 지역발전위원회(대통령직속) 자문위원

- 한국건강관리협회 전라북도지부장(현)  

 

 

■ 취재후기

기자로서 선배 언론인을 인터뷰한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4년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인터뷰 대상은 전북일보 기자로 시작해 지역신문사 편집국장과 사장 등을 모두 역임한 전북 언론계의 다른 원로 대선배인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원장. 그 때는 언론사에 입사한지 1년 남짓한 때인 터라 인터뷰 상대였던 대선배(이치백 원장)이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 마냥 어여삐 봐줬으리라.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부담감은 언론사에 입사한지 불과 1년에 남짓했던 그때 당시보다 이번이 더욱 컸다.

이번에 만난 대선배(임병찬 사장)는 여전히 신문사 대표로 재직중인 현직 언론인인 데다, 그에게 나는 어쩌면 열악한 지방언론의 환경 속에서 치열한 경쟁구도를 펼쳐야 하는 타사의 평기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처음 마주본 그의 시선에 마치 온몸이 발가벗겨진 것과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한 기분은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 둘씩 풀기 시작하면서 이내 사라졌다.

그가 던진 화두의 대부분은 ‘전북발전’에 대한 것이었다.

전북발전을 위한 지역현안 문제로 시작한 화두는 이내 교육의 중요성과 지역인재 육성의 필요성, 도민의 결속, 지역균형개발을 위한 투쟁 등으로 이어졌다.

3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는 그의 말에는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말은 “나는 영원한 기자다”로 끝이 났다.

“젊은이여!, 한 우물을 파라! 그러면 반드시 물이 나올 것이다.

그것도 달디 단 꿀물이.”라는 조언과 함께. ‘누구나 열정을 가지고 올곧게 한가지 일에 매달리면 고단한 삶의 벽을 넘어 큰 뜻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의 마지막 말에서 이날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가장 커다란 힘과 울림이 느껴졌다.

/김근태기자 g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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