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폐장 갈등넘어‘화해의 길’에 서다
방폐장 갈등넘어‘화해의 길’에 서다
  • 전북중앙
  • 승인 2015.03.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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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규 부안군수를 만나다
▲ 과거의 성찰을 통해 소통 행정으로 '일 잘하는 군수'로 거듭난 김종규 부안군수./김현표기자

핵 군수가 화려하게 귀환했다.
‘제2의 광주’사건이라 불릴 정도로 치열했던 2003년, 부안군 위도면에 방사능 폐기물처리장을 유치하려다 반대에 부딪힌 뒤 2006년 재선에 실패했던 김종규 부안군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 부안에서는 방폐장 문제가 광기가 되어 군 전체를 휘몰고 지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지키기 위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예전에 없던 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사법 처리되었다.
정책결정 과정에서 주민과의 소통에 실패한 군수는 하루아침에 나락에 떨어졌고, 주민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초유의 사태마저 벌어졌다.
그러나 11년이 지난 2014년 6월 지방선거에서 김 군수는 지역민들에 의해 당당히 군수로 재 입성했다.
한편의 드라마였다.
극한갈등을 넘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책무를 안게된 김 군수는 취임직후부터 화합을 최우선정책으로 부안을 치유하고 있다.
방폐장 실패를 딛고 일어선 김 군수가 부안군민들의 염원처럼 화합과 포용의 군정을 펼칠지, 전국이 주목하고 있다.
/편집자 주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다.

2003년. 부안의 거리는 방사능 마크가 찍힌 노란색 깃발로 물결을 쳤고, 고기를 잡는 어부도, 과일을 파는 시장상인도, 농사를 짓는 농민도 모두 방폐장으로부터 고향을 지켜내는 투사로 변모되어 있는 시기였다.

당시의 어조대로라면 “핵은 곧 죽음이요. 그 죽음의 원인은 한 사람”으로부터 기인했다.

2003년 7월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 유치를 신청한 부안군수 김종규. 그는 전국 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방폐장 유치를 신청해 정부와 전북도로부터 ‘17년 국가숙원사업의 해결사’라는 칭찬을 들었지만 반대 주민들로부터는 ‘주민을 배신하고 고향을 팔아먹은 매향노’로 불렸다.

당시 1년여 동안 부안에서의 공권력은 민심 앞에 무너졌다.

시위 주민들은 300여회의 집회를 열면서 부안군청 주변이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고속도로를 점거하기도 했고 40일 넘게 자녀 등교를 막기도 했다.

쇠파이프와 화염병이 난무하면서 주민 2만3000명의 부안읍에 1만여 명의 경찰이 투입됐다.

그는 군수 취임 이후 날로 줄어드는 군 인구와 미래가 보이지 않는 군의 현실을 타개할 방안이 없을까 줄 곧 고민해 왔다.

지역의 획기적 발전을 위해 대형 국책사업을 유치하는 길만이 지금 부안군이 처한 현실을 구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특히 대부분 농어촌의 부채가 심각한 상황이지만 위도 사람들이 안고 있는 빚더미는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는 게 주민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대부분 가구당 수천만 원에서 수억원씩의 빚을 수협이나 농협에 지고 있으며 사채를 쓰는 주민도 많다는 것. 때문에 빚을 갚기 위해 빚을 얻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위도만의 문제가 아닌 부안군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생거부안(生居扶安)이라는 말은 과거의 잔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때 그의 눈에 들어온 사업이 바로 방폐장 유치였다.

그는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고 부안을 살리기 위해 누군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우선 그는 정부에 지역 특별지원금을 3000억 원에서 6000억 원으로 올려줄 것과 새만금 사업지구 안에 풍력, 조력 등 친환경 미래 에너지 연구단지 등을 조성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농업관련 기관과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 바다목장 조성, 국립공원 구역 조정 등을 요청했고, 정부 역시 긍정적 입장을 표명했다.

주민 투표를 통해 위도 주민 1700여 명 중 90% 이상이 방폐장 유치에 찬성했다.

처음엔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 싶었으나 내륙에 있는 주민들이 반대했다.

그들은 대부분 농·어업 중심으로 먹고살았는데 방폐장이 들어서면 농수산물 판매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부안군은 군의회 동의도 구하지 않는 등 주민 설득을 소홀히 했다.

여기에 환경·반핵 단체들이 나서 주민들의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그의 아름다운 미래 청사진은 민심과 큰 괴리를 보였고,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하루아침에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주민들로부터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단체장

2003년 9월 추석. 위도 방폐장 유치문제로 뜬눈으로 날을 세다시피 하던 시절, 스님에게 자문을 구하고자 내소사를 방문했다.

군수 방문 소식을 접한 방폐장 반대측 주민들은 그 일대를 에워싸고 시위를 벌였다.

“뒷문으로 나가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 그는 “나는 당당히 앞문으로 나가겠다”며 주민들 속에서 자신의 진심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미 성날 데로 성난 민심은 그의 진심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폭행을 당했고, 코뼈와 늑골이 부러졌다.

얼굴과 머리뼈 일부가 함몰되는가 하면 패에 물이 차는 중상을 입었다.

현직 단체장이 주민들에게 단체로 구타를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되자 신문과 방송 등 각종 매체는 앞 다퉈 그 소식을 전했다.

그는 일약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현직 단체장이 되었다.

주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 받은 군수. 고향이 위도인 그는 자신의 고향에 ‘혐오시설’을 들어오려다 실패한 나쁜 군수로, ‘주민을 배신하고 고향을 팔아먹은 매향노’로 낙인찍혔다.

한 때 주머니에 사탕을 넣고 다니며 만나는 주민들에게 하나씩 건넸던 그에게 주민들은 ‘사탕 아저씨’, 군수로 당선된 뒤에는 ‘사탕군수’로 달콤한 별명을 달아줬었다.

그런 그가 어느새 ‘핵종규’, ‘핵군수’로 불리며 부안군의 전무후무한 악(惡)이 되어 있었다.

 

 

◇질곡의 세월, 변화되는 민심

대게는 이런 상황에 놓이면 숨죽이며 여생을 살아간다거나 고향을 등지기 일쑤다.

심지어는 고향이 싫고 나라가 싫어 이민까지 떠나버리곤 한다.

그러나 김종규 그는 달랐다.

숨죽이거나 고향을 등지기는커녕 더 앞장서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 간 싸움에서 전해지는 고사다.

가시가 많은 나무에 누워 자고 쓰디쓴 곰의 쓸개를 핥으며 패전의 굴욕을 되새겼다는 뜻이다.

그가 그랬다.

처음 그가 군수선거에 재도전할 때 일부 주민들은 “무슨 낯으로 또 나왔냐.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며 비아냥거리기 일쑤였고, 그의 낙선을 위해 조직적인 힘이 움직이기도 했다.

이유야 어쨌든 주민들로부터 다시 선택받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두 번째 도전은 첫 번째와는 또 달랐다.

차츰 주민들이 그의 진심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혼자 잘 먹고 잘살자고 헌 짓도 아니고, 다 부안 발전시키자고 헌 짓인디….” 주민들 사이에서 연민의 정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그 연민은 차츰 ‘이해’로 변화되어 갔다.

“아이고 이게 뭔 고생이여. 이젠 주민들 눈물 빼지 말고, 속 썩이지 말고, 잘햐” 동네 어르신들을 중심으로 차츰 그를 보듬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역시 다수를 이해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거듭된 도전과 응전에 그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갔지만, 변화된 민심을 보며 정신만큼은 더욱 또렷해졌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선거에서 상대편 지지자들은 핵마크가 찍힌 노랑 조끼를 입고 나와 부안사태를 상기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네 차례 선거에서 그의 득표율은 34.4%→38.7%→43.2%→44.6%로 올랐고 끝내 군수선거에서 49.2%의 득표율로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그는 매일 오전 4시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마친 뒤 6시 부안읍내 인력시장으로 향했다.

논에 나가 모내기철엔 모판을 들어줬고 수확철엔 나락 포대를 들쳐 멨다.

부안읍 버스터미널 앞에서 사방을 향해 엎드렸다.

지나는 차들에서 경적이 이어졌고 여러 군민은 창을 열고 손을 흔들어줬다.

 

 

◇‘깨달음’과 되찾은 명예

재선거를 포함해 세 번의 지방선거와 19대 총선에서 연거푸 좌절한 그가 다시 일어섰다.

2014년 치러진 6·4 지방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무소속으로 부안군수에 당선된 것이다.

그는 군민들로부터 1만6471표(49.2%)를 득표해 1만6471표(47.4%)를 얻은 새정치민주연합 이병학 후보를 1.79%포인트 차로 누르고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이날 그의 당선은 이병학 후보에게 졌던 지난 2006년 이후 8년 만의 재대결이었다.

특히 방폐장 찬성과 반대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두 후보간 대결이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고, 그의 명예회복으로 막을 내렸다.

당선 인터뷰에서 그는 과거 방폐장 문제를 의식이라도 한 듯 “과거의 갈등에서 벗어나 이제 미래로 나아가라는 군민의 강력한 주문이 담겨 있다”며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갈등을 치유하고 봉합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덧붙여 “용서와 사랑으로 일할 기회를 다시 주신 군민들께 감사하다”며 “자랑스러운 부안, 행복한 부안을 만들라는 지상명령을 받은 것”이라 자세를 낮췄다.

당시 개표를 지켜보던 그는 그간에 설움에 젖은 듯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전나무 숲길이 아름다운 내소사에서 벌어졌던 광기의 세월을 떠올리기라도 한 것일까? 암울했던 질곡의 세월이 있었기나 한 듯 6월의 내소사 대웅보전 뒤뜰 기슭 양지바른 곳은 제비꽃이 피어올라 있었다.

그의 마음도 비로소 평안해 졌으리라. 그에게 과거는 성찰의 시간이었고,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그는 한수원 본사 이전이나 3조600억여 원에 달하는 방폐장 유치 파급효과도, 1조5000억 원이 투자돼 2018년 완성될 양성자가속기 효과도 모두 잃었지만 대신 더 큰 진리를 얻었다.

그는 “왜 내 진심을 몰라주는 걸까? 처음에는 주민들이 야속하고 아쉬웠다.

그러나 주민 입장에서는 섭섭하고 용서가 안 되는 일이었다는 걸 시간이 흐른 뒤 깨닫게 되었다”며 “아무리 좋은 정책이나 사업도 주민과의 소통 없이 추진될 수 없다는 소중한 진리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가 과거 대신 미래를 이야기 하는 이유다.

 

 

◇과거에 대한 성찰, 소통 행정으로 거듭

과거의 성찰을 통해 배운 ‘소통의 중요성’은 김종규호의 곳곳에서 잘 묻어나 있다.

그는 기존 관행적으로 이어져왔던 딱딱하고 형식적인 연초 방문 대신 자유로운 질의 답변이 오가는 형태의 '우리동네 공감 토크쇼'를 진행해 일방적 소통이 아닌 상호 소통의 장을 만들었다.

또한 군, 면정 설명회와 건의사항 청취 중심의 '주민과의 대화', 민생탐방 등을 통해 군정의 행복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올해 초 민선 6기 공약이행평가단은 그의 공약 추진 상황을 평가했다.

전체 72건 중 64건이 정상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행률이 무려 88.8%. ‘일 잘하는 군수’라는 타이틀이 그냥 붙은 게 아니다.

그는 앞선 해에는 매니페스토 약속대상 시상식에서 선거공보분야 기초자치단체 부문 최우수상 수상의 영예를 얻기도 했다.

‘소통의 중요성’이라는 과거의 교훈은 부안군의 소통행정을 낳았다.

평가단 역시 군민들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지난해 9월, 주민 25명 규모로 구성됐다.

아예 공약 기획, 확정 단계에서부터 평가까지 전 과정에 주민 모두를 참여시킨 것이다.

군정의 민주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각종 단체들간의 간담회 이름도 아예 ‘소통 간담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소통에 대한 이런 그의 고민은 군정의 곳곳에 잘 묻어나 있다.

 

 

◇ “모두가 제 잘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잘못을 쉽게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아니 인정하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공인의 입장에서 그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그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주민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내가 싫으면 나쁜 거다.

소통하지 못했다.

나는 정 부에 속았지만 주민들은 내게 섭섭했다.

정치권과 외부세력이 본질을 왜곡하기도 했지만 내가 정책 판단을 잘못했다.

소통부재든 정책 판단이든 잘못엔 이유가 없다.

내가 책임져야 했다.”

당시 방폐장 사태로 부안에선 주민과 경찰 460여명이 다쳤고 경찰차량과 승용차, 군청 별관이 불탔다.

특히 주민 45명이 구속되는 등 392명이 사법 처리됐다.

그는 내소사에서 성난 민심 앞에 코뼈와 늑골이 부러져 응급차에 실려 갔고, 수개월간 입원 치료를 해야 했다.

보통 사람같으면 이를 ‘득득’ 갈며 복수의 칼날을 갈법하다.

그러나 그는 주민 앞에 무릎 꿇고 석고대죄의 기나긴 시간을 가졌고, 군수 퇴임을 일주일여 앞두고 청와대 등을 찾았다.

“그들에게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모두 저의 책임입니다.

제가 그들을 그렇게 분노하게 했습니다.

선처해 주십시오.”

그는 사법처리 된 주민 전원에 대한 선처와 사면복권, 그리고 부안 발전을 위한 특별지원을 요청했다.

과거 성찰을 통해 얻은 소통의 교훈과 용서, 미덕은 그의 앞으로의 인생에 크나큰 자산이 될 것이며 그 자산은 고스란히 부안군의 발전에 발현될 것이라 믿는다.



/부안=김태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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