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계의 작은거인' 안숙선 명창

▲ 언제나 국악의 새로운 길을 고민하는 국악계의 '작은 거인' 안숙선 명창

 

국민 배우, 국민 스타, 국민 가수, 국민 스포츠선수.이들의 공통점은 무얼까.
고집스러울 정도로 자신만의 세계를 펴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로 대중과 함께한다는 것이다.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운이 아닌 노력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들, 그러면서도 지성과 깔끔함 여기에 서민적 이미지까지 더한다면 ‘국민’이란 수식어가 붙게 된다.
대중적 사랑은 기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숙선 명창은 국민 소리꾼이다.
지독한 외길 고집으로 정상에 올랐지만 그 티를 내지 않고 서민적이다.
작든 크든 무대를 가리지 않는다.
어떤 무대든 최선을 다하며 관객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이제는 여유를 가질 법도 하지만 언제나 강행군이다.
소리로 살았고 소리가 인생이며, 남은 인생도 소리로 채울 심산이다.
그를 ‘작은 거인’이라 칭하는 이유다.

/편집자주



   

“늘그막에 무슨 고생인 줄 모르겠어. 작년 가을 기관지가 좋지 않아 크게 고생했는데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여기서 또 고생이네. 이젠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니까.”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원들과 한창 연습을 마치고 나온 안숙선 명창(65)을 만났다.

보자마자 고생을 들먹이며 힘겨운 표정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의 눈을 보면 더욱 그렇다.

무대에서 조명보다 더 빛나며 관객을 사로잡던 눈망울이 아직도 그대로다.

시간이 흐르고 힘은 점점 빠지지만 소리에 대한 열정은 한결같다.

그의 눈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고생은커녕 오히려 즐기는 모습이다.

2013년 10월에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에 보금자리를 폈으니 횟수로 2년이 됐다.

민속악단을 비롯해 국악원 네 단체가 일 년 내내 정기공연과 기획공연을 펼치고 있다.

2년이란 짧은 시간을 손으로 세기 어려울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늘그막에 고생’이란 말이 나올 법 하다.

하지만 누가 그를 막을 것인가. 작은 키로 단원들 사이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의 존재는 아직도 여전하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단원들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방향타가 되고 그의 소리는 단원들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다.

앞만 보며 달려왔던 젊은 시절, 무대에서 소리를 하는 것이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

그게 인생의 최선이었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고희를 앞둔 시점에서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이제는 국악의 새로운 길을 고민해야겠다는 판단이다.

나이 먹은 사람의 주책어린 고민이 아니라 국악의 정체성을 살리고 새로운 방향을 만들자는 차원에서다.

남원이 고향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국악을 보고 자랐다.

국악가족 출신이란 것을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남원국악원에 들어간 그는 춘향가 중 이별대목 등을 학습했다.

이모로부터는 가야금 산조와 승무, 민살풀이 등을 배웠다.

명창 강도근은 외당숙이고, 외삼촌은 가야금과 창에 뛰어났다.

남원 장터에 들어선 서커스 공연은 어린 그에게 호기심 가득한 무대였다.

공연장에서 흘러나오는 민요들은 그에게 좋은 학습교재였다.

국악에 낯설지 않는 환경이 오늘날 그를 만든 것이다.

본격적 소리공부는 서울에서 만정 김소희를 만나면서부터다.

이 때 그는 흥부가, 춘향가, 심청가 등을 익히기 시작했다.

평생 소리를 할 것이란 일종의 의무감도 이 때 생겨났다.

그의 나이 30살 때다.

오바탕을 다 배워야 소리깊이와 무대 등을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심청가, 수궁가, 춘향가 완창을 위해 내로라하는 선생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스승을 자꾸 바꾼다는 것은 오히려 이 바닥에서 눈 밖에 날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창극단이 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했다.

창극단원이 된 그는 이곳에서 국내를 대표하는 명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어렵게 발품을 팔아가며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만나기 어려운 명인들을 만난 것 자체가 놀라운데 이들의 소리가 모두 제각각 다르다는 것에서 또 놀랐다.

백자같이 깨끗한 소리가 있는가 하면 청자같은 푸른 빛이 도는 소리도 알게 됐다.

소리의 구조와 다양성이 존재함을 이 때 깨달은 셈이다.

당대 명창들의 바디를 자기 것으로 소화시켜 자신만의 무대에 선보일 수 있는 발판인 셈이다.

2004년 안 명창은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을 맡으면서 다시 한 번 관심을 받게 됐다.

소리꾼이 축제 조직위원장에 어울리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충분한 고민 끝에 수락을 했다.

우리 소리의 특성을 축제를 통해 찾을 수 있다면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축제를 통해 고향에 봉사를 할 수 있다는 자부심도 한 몫 했다.

한낱 소리꾼이던 그가 축제 조직위원장을 맡으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

소리 외에 복잡한 인생과 세상을 알게 됐고 상대방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배웠다.

오히려 지금 하면 더 잘한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현재 경험을 소리축제 쏟아 낸다면 그 때보다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소리축제와 관련해선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 전주와 서울을 오가는 그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형편이었다.

서울 일을 마치고 전주 큰 행사에 내려가야 하는데 시간적으로 힘든 상황이 됐다.

경찰 순찰대가 머릿속을 스쳤다.

무작정 경찰을 찾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며, 늦으면 국제적 망신이 벌어진다’고 하소연했고 다행스럽게 경찰의 도움으로 제 시간내에 전주에 도착할 수 있게 됐다.

퀵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다.

수많은 공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도 경찰과 관련돼 있다.

VIP를 위한 큰 공연 등도 그의 손을 거쳐 갔지만 유독 경찰 관객을 상대로 한 공연이 기억에 남는다.

경직된 분위기로 시작된 공연이지만 큰 박수로 마무리된 공연이다.

우리 어머니가 좋아한다며 사인을 요구하는 경찰도 있었다.

어릴 때 겁이 많아 무서웠던 경찰이 이날 공연으로 선입견을 깨는 기회가 됐다.

또 소리축제 때 경찰에게 전주로 데려달라는 뻔뻔함도 이 때 생겼다.

그는 가야금산조, 병창 부문 국가중요무형문화재다.

판소리 명창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에 비하면 이례적이다.

판소리 부문 무형문화재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 사연 또한 재미있다.

만정 김소희에게 소리를 배울 때다.

도저히 몸이 아파 소리공부를 잠시 미룬 적이 있었다.

무턱대고 쉴 수는 없고 해서 가야금병창 대가인 박귀희씨를 찾았다.

어릴 때 이모에게 배웠던 가야금산조를 잇고 싶은 생각도 그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예술적 재능은 판소리 뿐 아니라 가야금병창도 손쉽게 소화할 수 있었다.

운이 좋게 문화재청이 인정하는 가야금병창 전수자가 됐고, 박귀희 명인이 세상을 떠난 후 대를 잇게 됐다.

이 때 학습한 것이 훗날 그를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으로 이끌게 된 것이다.

누구나 배우면 익힐 수 있느냐는 우문에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온다.

소리는 타고나야 한다는 것이다.

또 갈고 닦지 않으면 금세 녹이 스는 게 소리라는 것이다.

아들과 딸이 있지만 타고 나지 않았던지 아들은 소리를 포기했다.

딸은 거문고를 전공해 자신의 대를 이어가고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아들 대신 손녀들이 국악의 길에 나선 점이다.

그를 호칭하는 말이 많다.

명창과 소리꾼은 기본이고 국악계의 프리마돈나, 국악 디바 등이 항상 뒤따른다.

1980년대 한창 공연을 왕성히 하던 시절, 모 잡지에서 칭한 게 프리마돈나다.

이후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잘 어울리는 별명이다.

소리를 사랑했던 안 명창의 심정을 잘 대변한 말이다.

작은 거인으로도 불린다.

작은 몸이지만 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또 남을 이해하고 찬바람이 부는 겉모습에 비해 알고 보면 부드럽다는 이유에서다.

“길을 걸어갈 때 나를 보배로 여기는 눈초리를 느낀다.

소리를 허투루 해왔다면 그런 평을 받을까 생각이 든다.

우리 노래, 우리 가치관, 우리 혼이 담긴 소리를 해왔고 소리 외엔 할 것이 없는 인생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 깊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이유다.

젊은 시절 서슬 시퍼런 소리에 비하면 많은 아쉬움도 있지만 멈출 수는 없다.

소리를 통해 우리네 유전자를 확인하고, 뿌듯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아파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하는 게 타고난 운명인 듯싶다.

때문에 소리는 그에게 친구요, 남편이요, 자식이다.

일생을 함께 할 반려자다.

소리로 여러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고 반대로 자신의 인생에도 다양한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일관된 소리꾼이란 평을 받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요즘 그는 고민의 늪에 빠졌다.

고민보단 시야가 넓어진 셈이다.

예전엔 우리 소리의 예술성을 높이기 위한 혼자만의 움직이었다면, 이제는 국악에 대한 새로운 방향에 대한 고민이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모자랄 것 같은 조급함도 밀려온다.

국악의 원형을 유지한 채 대중성을 함께 지녀야 할 문제를 풀어야 할 과제로 떠오른다.

국악이 나아가야 할 희망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희망이 있어야 한다.

희망이 없다면 절망이고, 절망은 국악의 명맥을 끊기게 하는 요소다.

전통을 근간으로 하되 현재 양식에 맞게 발전시키는 고민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쉽사리 답을 찾을 순 없지만 꾸준한 연구와 고민이 선제조건이다.

과거 국악은 우리 삶 일부였다.

토속민요, 농요 등이 일상생활과 함께 했고 일상에서 퍼져 나왔다.

최근엔 대중가요나 서양의 문화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며 일상생활의 가치관마저 흔들고 있는 시점이다.

국악의 정체성을 비롯해 대중성을 함께 잡아야 할 이유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판소리가 등재될 정도로 그 위상과 깊이는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우리 것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보편화돼야 한다.

국악이 우리 삶에서 저절로 만들어진 과거처럼 어떤 식으로 자리매김을 해야 할 지 고민을 하고 있다.”

정리가 되면 고향에 가고 싶다는 안숙선 명창. 그에 앞서 소리꾼으로서 또 다른 희망을 찾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 국악의 밝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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