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성이 변해야 전북 바꿀 수 있어" 적극성-실리 주문 초중생때 신문만들고 기고 보내며 언론인으로 한발짝 "기자는 정의감 넘쳐야" 여든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 눈길

▲ 항상 약자편에서 같이 고민해줄 수 있는 사람이 '참기자'라며 신문의 존재 이유가 정의감이라고 재차 강조하는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회 회장.

먹구름이 낀 듯 답답하거나 혼란스러움이 느껴질 때, 원로의 충고만한 게 없다먹구름이 낀 듯 답답하거나 혼란스러움이 느껴질 때, 원로의 충고만한 게 없다.
전북은 정치경제사회 전 분야에 걸쳐 침체가 장기화되며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런 흐름에 지역사회 애정을 갖고 꾸준히 ‘쓴소리’ 내는 언론 원로가 있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회 회장(84)이다.
지역에서 언론계만 50년을 몸담았던 전북 역사의 산 증인으로, 지금은 흩어져 있는 전북 기록을 한 묶음으로 묶어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편집자주

 

◇도민성이 바뀌어야 전북을 바꿀 수 있다 6일 전주시 중앙동 사무실에서 만난 이 회장의 얼굴에서는 연륜이 풍겼고 대화에서는 풍부한 경험들이 묻어 나왔다.

한마디로 깊고 맑았다.

언론을 통해 거치지 않은 분야가 없어서 그런지 얼굴에도 여유가 넘쳤다.

지역발전과 정치권에 대한 조언을 할 때는 현역 못지않은 비판의식과 열정도 느낄 수 있었다.

전북이 낙후성을 탈피할 방향을 물었더니 “도민성이 변해야 전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전북사람은 조용하고 방관하며 보신주의적인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대 선거때마다 투표 성향을 보면 전북사람들은 단 한번도 예외(?)를 둔 사례 없이 한 쪽에만 표를 몰아주다 보니, 오랜 세월 집권여당에게 ‘푸대접’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젠 전북도민들도 너무 의연하거나 방관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성과 실리를 택하는 쪽으로 소위 ‘도민성’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 50년간 전북 언론과 지역사의 산 증인 이 회장은 지역 내 저명한 언론인 출신이자, 원로 지식인 중 한 명이다.

1953년 전북일보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스물넷 정의감이 넘쳤던 그 시절, 이 회장은 서울 일간지에서도 종군기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통신사 등을 거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지역 신문사를 두루 섭렵했다.

취재기자와 편집기자, 주재기자, 유신치하 1도1사 시절의 편집국장, 주필, 이사, 대표이사까지 역임해 50년간 전북 언론과 지역사의 산 증인이 되어왔다.

비교적 전문성이 요구되는 사진부장과 조사부장, 교정부장을 제외한 신문사 내 모든 부서와 직책을 경험해 봤다.

이후 이 회장은 또 우리나라 언론계를 대표하는 조직인 한국기자협회의 발기인으로서 감사를 맡았다.

전북지회의 초대 지회장, 중견 언론인들의 언론연구 단체인 관훈클럽 감사를 역임하는 등 언론의 발전과 지역언론의 올바른 가치관 정립에 힘써왔다.

사단법인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장이자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으로도 활동하며 10여 년 넘게 우리지역 역사의 뿌리 찾기에 천착해왔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그 역사가 있고, 삶이 있습니다.

사람의 역사는 더하겠지요? 향토사 의의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뿌리 없는 역사는 없으니까요.” 그가 향토사 연구에 열정을 쏟아온 이유다.

우리 뿌리의 찾기와 그 역사적 사건들을 재 조명하는 한편 권위와 명예가 실추됐던 사람들에 관해서도 역사적 평가를 새롭게 하는데 주력해왔다.

그가 언론인에서 한국향토사연구회 전국회장으로 발탁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한국 역사나 지역의 향토문화 저서들을 만들 때 전국에서 기초자료로 활용할 만큼 역사분야의 선구자적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역사와 한국향토사 문제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추게 됐다.

이런 노력 덕분에 전북 지회장과 더불어 전국회장을 동시에 맡아 우리 역사의 뿌리 찾기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는 전국적으로 1천800여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상태. 이회장은 전북은 소식지와 연구논문집을 꾸준히 발간하는 유일한 곳이기에 자부심이 앞선다며 ‘전라감사’ 사료집 편찬은 기념비적인 작업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 초등교육이 중요하더라 이 회장은 글 솜씨는 소학교 시절부터 유명했다고 한다.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소학교, 오늘날로 말하면 초등학교부터 다니던 시절 담임선생님께서 “너는 공부를 하려거든 지리나 역사를 공부하고, 아니면 외교관이나 기자가 되라.”고 목표를 정해줄 정도였다.

선생님의 눈썰미가 틀리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그 가르침이 어린 제자에게 목표로 바뀐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결국 언론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초등학교시절에는 어린이신문을 직접 만들어보고, 중학생일 때는 독자투고를 통해 신문에 기고를 하곤 했다고 한다.

“이래서들 초등교육이 중요하다고들 하는 것 같습니다.

3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어릴 때 신문기자를 하면 좋겠다던 선생님 말씀대로 제 꿈을 이뤄왔습니다.

” 이 회장은 중학교시절 일본어로 언론사에 독자투고를 보내곤 했는데, 이름과 내용이 활자로 실리곤 할 때면, 그렇게 가슴이 떨리고 설렐 수 없었다고 한다.

  ◇기자는 정의감이 넘쳐야 한다 1950년대 이 회장이 기자를 처음 시작할 당시는 자유당 독재시대였다.

이 회장은 당시 신문 기자들은 ‘뭣도 없었지만 정의감이 넘쳤었다’고 추억했다.

당시 기자라면 으레 야권 성향인 사람으로 인식됐다.

부당한 게 없어야 할 정부에 꼬치꼬치 따지는 일을 직업으로 해서 그런 것이지만, 옳지 못한 일을 그냥 넘어가는 일은 하지 않으려 스스로 노력하곤 했다고. 그러면서 이 회장은 신문의 존재 이유에 대해 ‘정의감’을 강조했다.

독재 정권이 부르짖었던 그런 ‘정의’가 아닌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고 담아내는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자들 역시 정의로운 신문을 위해 정의감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항상 약자 편에서 어려운 사람 곁에 함께 고민해줄 수 있는 사람이 ‘참기자’아니겠어요? 유혹과 시험에 들지 말고, 쉬운 길은 다시 되짚어 보고 가는 기자들이 많이 생겨날 때, 정의로운 사회도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게 지역신문의 역할입니다.

” 2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에도 말투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의 세상이니, 나이든 사람들은 뒷방으로 물러나야 한다던 이 회장은 지역 내 이슈와 신문 이야기를 하는 순간은 여전히 언론인이고 기자였다.

“요즘 언론환경이 별로 좋지 않다”며 마른침을 삼키던 이 회장은 “그러나 이 같은 신문 위기가 역설적으로 가장 신문이 절실한 때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고 자신했다.

신문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렇기에 다양하고 깊이 있는 정보를 밀도 높게 전하는 신문이 되길 바랍니다.

”고 조언했다.

이 회장은 활자 신문은 위기지만, 제대로 된 신문은 오히려 더욱 빛을 볼 수 있다고 확신했다.

  ◇역사공부를 해보라던 가르침을 70넘어서야 시작 이 회장은 1950년부터 지금까지 중앙지와 지역일간지를 구독하고 있다.

단 하루도 신문을 읽지 않은 적이 없다는 그는 신문을 교과서처럼 정독으로 읽어가며 기자적 감각과 식견을 유지하고 있다.

덕분에 정치 경제 · 사회 전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언론계를 은퇴할 2003년 당시, 향토문화연구회에 회장으로 영입된 것이다.

일찍부터 지역 내에서도 그의 역사적 감각과 안목을 인정한 셈이다.

이 회장은 내공처럼 잠재돼 있던 식견을 지역 역사문화 바로잡기에 쏟아 부었다.

다양한 사회단체와 연구단체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굵직한 경력만 해도 수십 개가 넘을 정도다.

2008년부터는 임기 4년의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며 향토사에 대한 그의 시야를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기자로서 경험한 50년의 시간과 비상한 기억력, 지휘고하와 남녀노소를 불문한 그의 인맥들은 향토문화 연구를 하는 데 있어서 소중한 자산이 됐다.

그는 10년 넘게 지역향토사 연구와 더불어 협회의 월간 회보인 ‘전북문화’를 발간하고 있다.

가끔은 지역신문에 기획기사를 연재하거나 칼럼을 기고하며 언론인이자 원로로서 펜을 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난 추억보다 앞으로 과제를 말하는 목소리에 더 힘을 줬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눈빛도 또렷해지곤 했다.

/박정미기자 jung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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