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위치 한식 건축물로 1901년 건축 1973년 도기념물 제6호지정 200살 넘은 탱자나무 명물

▲ 가람 이병기 생가는 양반집의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안채, 사랑채, 고방채, 모정으로 구성됐다.
▲ '가람 이병기 선생 상'의 모습이다.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번지 진사동에 있는 가람 이병기 생가는 한식 건물로 1973년 전북도 기념물 제6호 지정됐다.

이 생가는 1901년 건축된 것으로 특별한 건축적 특징은 없으나 양반집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고패 형식의 안채와 일자형 사랑채, 고방채, 모정으로 구성됐다.

입구에 세워졌던 3칸의 행랑채는 철거됐다.

모정 앞쪽에는 두 개의 작은 못이 있고 뒤쪽에는 일꾼을 위한 각각 1칸의 방과 부엌으로 된 외딴채가 있다.

지붕은 원래 초가였으나 후에 기와로 개량되었다고 다시 초가로 환원됐다.

크지도 않고 옹색하지도 않은 집채 그리고 집 뒤의 대나무숲에 이르기까지 선비집의 은은하고 담백한 생활의 멋을 느낄 수 있다.

생가엔 수우재란 사랑채가 있다.

지혜를 숨기고 겉으로 어리석은 채를 한다는 뜻의 수우재는 마치 일제 강점기 때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숨기고 살아간 본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허세나 야단스러움이 없는 생가는 좁다란 마루에 걸터앉아 햇볕이라도 쬐고 싶은 친밀감을 준다.

가람은 평소 술복, 제자복, 화초복 등 세 가지 복을 타고났다고 자처했다.

아침에도 술을 먹었고 점심과 저녁에도 술을 먹었다.

밥보다 술이 영양가가 많다는 게 선생의 지론이었다.

제자론 전북을 대표하는 고하 최승범 교수가 대표적이며, 난초사랑은 부인의 질투를 받을 정도였단다.

집 옆엔 아주 오래된 탱자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최소 200년 이상 추정되고 있으며 높이가 약 5m에 달한다.

탱자의 기품이 가람의 기품과 닮았다고 해 익산시는 탱자나무를 명물로 지정했다.

생가 옆 오솔길을 오르면 가람의 묘를 만날 수 있다.

모양은 우리 시대 최고의 국문학자답지 않게 조촐하다.

비석을 크게 만들지 말라는 생전 유언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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