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을 만나다

▲ 한국수력원자력 조석 사장은 '국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나서겠다'는 의지로 수장 자리에 올라 원전문제 등을 푼 해결사로 통한다.

지난 2012년. 틈만 나면 멈추는 원전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원전 납품 비리와 부품성적서 위조 등으로 서민들은 여름철 에어컨도 켜지 못한 채 더위에 시달려야만 했고, 한겨울에도 전기를 쓸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 사장으로 취임해 엉망이 된 조직을 다잡았던 인물이 있다.
바로 전북출신 조 석 사장(58)이다.
그는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원전사업기획단장과 청와대 행정관, 지식경제부 제2차관 등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다.
2013년 9월에 한수원 사장으로 취임해 3년 임기의 반환점을 돌아선 그를 전북중앙이 만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희망에 대해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10일, 서울 영동대로길에 있는 한수원 사장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편집자주

 

 

[나는, 어쩔 수 없는 모범생]

조 석 사장은 교육자 집안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렵고 힘든 시절이다 보니, 부모님 손을 떠나 익산 함열 조부모님 댁에서 자랐다.

특히 할아버지가 주신 애정과 관심은 다른 형제들과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컸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아무런 걱정 없이 마냥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또래들보다 조숙했고, 공부도 곧잘 해서 그는 어릴 때부터 소위 ‘모범생’이였다.

선생님 말씀도 잘 듣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4년 즈음에는, 전주 동초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됐다.

성심재단에서 교편을 잡으셨던 아버지와 한 집에 살면서부터는 공부에 더욱 재미를 붙였고, 전주동중학교와 전주고등학교에 잇따라 입학했다.

조 석 사장은 당시를 회상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

“중학교는 소위 뺑뺑이 시절이었지만 고등학교는 시험을 봐서 들어갔습니다. 공부 좀 한다는 학교여서 그런지, 당시 가족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학생 때 누렸을 이탈이라 하면 중학교 3학년 때 딱 한번이었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애들아, 우리 모두 숙제하지 말자’고 선동(?)했다가 이를 우연히 들으신 선생님으로부터 엉덩이를 맞은 게 전부였다.

그때 이후론 ‘남이 안 듣는다고 함부로 얘기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고, 학교 다니는 내내 말 잘 듣는 학생으로 생활했다.

종교적 영향을 받아서일 수도 있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유아영세도 받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어릴 적 영향 탓인지, 프란치스코 교황님 오셨을 땐 가족들과 함께 새벽 4시부터 서울시청 앞 광장에 자리를 잡고, 말씀을 청취할 정도로 믿음이 깊다.

 

 

[재수(再修)라는 첫 시련이 나를 만들어]

조 석 사장은 ‘해결사’이미지가 가장 인물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서울대학교 입시에 낙방하면서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밑도 끝도 없이 서울로 상경해, 오직 공부에만 매달렸다. ‘수재’를 꼬리표처럼 달고 살았던 고향에서의 기억을 지워가며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야 했다.

“오직 저만 생각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이 멈췄던 때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입장을 바꿔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됐지요.”

그래서일까? 지금의 그는 둥글둥글한 성격일 것 같은 외모와 달리 일 처리에 있어서는 단호하고 깔끔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 그는 30여 년 공직 생활 가운데 남이 나서기 꺼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가장 많이 선택 받았던 인물로도 꼽힌다.

남이 하기 싫은 일은 본인도 하기 싫은 법인데, 공직자로서 책임감이 남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특히 “국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나서겠다”는 의지는 언제나 확고하다.

19년 동안 사회적 갈등을 일으킨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부지 선정 건도 조 사장의 손에서 결론이 났던 바 있다.

그가 제안한 주민투표 방식은 획기적이었고 경북 경주에 방폐장이 들어서게 됐다.

2004년 원전사업기획단장을 맡았을 당시 최초로 주민투표 방식을 도입, 대형 국책사업인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 문제를 해결했다.

에너지정책기획관 시절에는 에너지기본법을 제정하고 국가에너지위원회를 발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외교학과 출신으로 통상 이슈에도 관심이 많지만 그의 주특기는 ‘에너지 분야’다.

산업자원부와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에 근무하며 에너지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탓에 한수원 위기가 무리 없이 지나가고 있다.

“한수원 사장직이 공석으로 있을 당시, 이 자리는 ‘독이 든 성배’까지 불릴 정도였습니다.

원자력계의 수장이 된다는 영예보다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원전 사고의 희생양 역할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었죠.

저 역시도 처음 이 자리를 수락해놓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막상 책임을 맡으니 잠이 오질 않았죠. ‘앞으로 어떻게 한수원을 이끌고 갈 것인가’ 절박하고 비장했습니다.

하지만 벼랑 끝에 선 것과 같던 그때 돌파구로 찾은 것은 귀를 열어 주민의 의견을 겸허한 자세로 경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대화하면서 소통을 시작하자 보이지 않던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죠.

그리고 직원들과 마주 보는 것이 대신 한 방향을 보도록 노력했습니다.

직원들의 얘기를 듣다 보니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그에 따른 상생 대책도 세울 수 있었죠.

결국은 내부의 삐걱거림을 바로 잡아가는 게, 외적의 성장을 이뤄내는 밑거름이었습니다.

더불어 소통의 열쇠는 경청의 힘이라는 귀중한 교훈도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국민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다 보면 최적의 상생 방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원자력발전소가 안전하게 운영되면 한수원의 신뢰도 역시 상승해 나가리라 믿습니다.”

 

 

[부안 방폐장 사태는…]

조 석 사장은 부안 방폐장에 대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회고 했다.

당시 그는 이와 관련된 이 업무를 보진 않았다.

2004년부터 2년간 원전사업기획단장을 맡으면서 사실상 부안 방폐장 유치 신청서를 반려하는 업무부터 담당을 했다.

이후에는 방사성폐기물처리장 부지 선정에도 참여했다.

“방폐장은 원자력발전을 하는 국가에서는 꼭 필요한 기초시설이지만 1978년 국내에 원전이 국내에 도입된 뒤 번번이 부지 선정에 실패했을 때인데요.

2003년에는 전북 부안에서 방폐장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등 주민들의 반발까지 거세 정부로서는 ‘풀리지 않는 숙제’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지역주민들에게 방폐장의 안정성을 충분히 인지하도록 했나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정보를 충분히 제공한 상태에서 주민들이 선택하는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민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부의 홍보가 부재한 상태에서 의사가 결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찌됐든 지역경제 발전의 좋은 기회 놓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방폐장과 그에 따른 지원들을 잘만 활용했다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조 사장은 충분히 소통하지 않은 상황에서, 추진됐던 지난날 고향의 오점을 많이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최근 고창과 부안 지역에 대한 민원도 언급했다.

“방사선비상계획구역 범위에 전북 고창과 부안지역 일부가 포함되지만, 인접한 면(面)단위는 이 구역에서 제외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역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현재 내부적으로 고심 중인데요.

어떻게든 고향에 도움이 되는 방안을 마련 중이니 만큼, 시간을 갖고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40여 년을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전북은 부인할 수 없는 나의 고향이라고 말하던 그는 “지역민들의 입장에서 최선이 무엇인지 생각하겠다”며 깊은 애정도 드러냈다.

 

 

[전북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서울 분위기는 이제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때문에 전북 사람으로 산다는 게 별다른 것도 아니라는 게 조 사장의 답변이다.

“고향에 대한 애정, 고향에 대한 사랑, 봉사하고 싶은 마음 등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건 거기까지일 뿐이지요.

저는 사람을 사귀는데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지역을 중심으로, 고려해서 만나지는 않습니다.

제 친구들은 경기도나 서울, 경상도까지 없는 지역이 없을 정도 입니다.”

다른 사람이 전북 사람을 대하는 편견에 노출된 적이 없는지에 대한 물음에도 “내 원칙과 룰만 보면 됩니다.

왜 다른 사람이 반칙하는 것을 돌아봅니까? 살아간다는 건 어떤 경주가 아닙니다.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과 같이 가는 것일 뿐입니다.”며 나름의 소신을 명쾌하게 밝혔다.

더불어 고향의 젊은 청년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상급대학에 진학하는 것에서부터 졸업하고 취업 일들이 청년들에게 힘든 일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극복해 나가는 게 바로 우리네 삶 아니겠습니까? 도전에 쉽게 굴복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이를 극복해 나갈 때 그곳에 새로운 세상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상대적 낙후감을 보이고 있는 전북에서 이 같은 역경 등을 뛰어넘는 인재들이 많이 나와, 큰 뜻 이뤄 나갔으면 합니다.”

퇴직 후 고향으로 내려와 봉사할 마음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내려가 봉사할 마음은 있지만, 내가 무엇인가 되기 위해 봉사할 마음은 없습니다.”며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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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혁신 '비리 없고 신뢰받는 원전' 성큼

 

조 석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1981년 제25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래 30여년간 공직에 몸담았다.

지식경제부(옛 산업자원부)가 담당하는 정책의 큰 축인 산업ㆍ에너지ㆍ무역 등 세 파트를 두루 거친 보기 드문 이력을 가지고 있어 한국경제 전반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2004년부터 2년간 원전사업기획단장을 맡아 방사성폐기물처리장 부지 선정을 위해 최초로 주민투표 방식을 도입하며 과감한 추진력을 보여줬다.

방폐장은 원자력발전을 하는 국가에서는 꼭 필요한 기초시설이지만 1978년 국내에 원전이 국내에 도입된 뒤 번번이 부지 선정에 실패했다.

2003년에는 전북 부안에서 방폐장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등 주민들의 반발까지 거세 정부로서는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조 사장은 2004년부터 원전사업기획단장을 맡아 방폐장 부지 선정 업무를 도맡았으며 2년간 우여곡절 끝에 2005년 주민투표를 통해 경주를 방폐장 부지로 최종 선정했다.

방폐장 부지 선정에 기여한 공로로 그는 2006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이 밖에도 2006년부터 2년간 산업자원부 에너지정책국장을 지내며 에너지기본법을 제정하고 국가에너지위원회를 발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산업정책국장ㆍ성장동력실장 등을 맡을 때는 국가 신성장동력을 발굴하고 산업융합촉진법을 제정하며 한국경제의 미래 먹거리 창출에 힘썼다.

공직을 떠나 2011년 한국산업단지공단 이사장에 이어 2013년 한수원 사장으로 취임했다.

취임 이후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는 직원들을 만나기 위해 전국을 돌며 소통의 시간을 자주 가져왔다.

조 석 사장의 진면목은 만성적인 원전비리 근절에서 힘을 발휘했다.

원전비리에 대한 예외없는 무관용 원칙을 적용해 원전비리 관련 여부가 드러날 경우 정도와 금액 과다 불문하고 퇴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감사실 인력을 30% 증원하고 회계분야 전문가를 외부에서 영입하는 등 발빠른 혁신을 주도했다.

조 사장의 강력한 혁신으로 인해 한수원은 ‘비리 없고 안전성에 신뢰받는 원전 원년’ 달성에 성큼 다가가고 있다.

 

조석 사장 약력

▦1957년 전북 익산

▦1981년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1997년 미국 미주리 주립대 경제학 석사, 경희대 경제학 박사

▦1981년 행정고등고시 합격

▦1998년 대통령비서실행정관

▦2000년 녹조근정훈장 수훈

▦2001년 산업자원부 총무과장

▦2004년 산업자원부 원전사업기획단장

▦2006년 산업자원부 생활산업국장

▦2006년 지식경제부 자원정책심의관, 에너지정책기획관

▦2006년 홍조근정훈장 수훈

▦2008년 지식경제부 산업경제정책관

▦2009년 지식경제부 성장동력실장

▦2011년 한국산업단지공단 이사장

 

/박정미기자 jung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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