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성강당 맥 잇는 청곡 김종회선생

한적한 시골길을 가야 한다.
구절양장 길을 가다 보면 양 옆에 가로수들이 낯선 자를 맞는다.
풍경도 이채롭고 종착지가 궁금해진다.
그 찰나 눈에 들어오는 게 황량한 벌판에 우뚝 선 한옥이다.
학성강당이다.
지난 2001년 이곳에 건립된 이후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기호학을 잇고 있다.
급변하는 세상, 온갖 부정부패와 부도덕이 판치는 시기, 이곳의 모습은 전혀 딴 세상이다.
배움에 있어선 귀천이 없고 높고 낮음을 구별할 수 없지만 학성강당은 외관조차 배움의 이상향을 제공한다.
평범한 필부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기운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발걸음조차 조심스럽고 손동작 하나 하나 신경이 쓰인다.
육중한 문을 열자 ‘끼이익’ 하면서 학성강당 전경에 눈에 들어온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편집자주
   

김제시 성덕면 대석마을에 있는 학성강당(學聖講堂)은 60여년 전 한학을 가르치기 위해 김제와 정읍을 돌다 2001년 이곳에 정착했다.

가난한 학생들을 찾아 다니고 이들이 편히 공부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다 보니 7곳을 돌고 돌아 현재 장소에 안착했다.

아들의 공부를 위해 세 번의 이사를 했다는 일종의 맹모삼천지교다.

학성강당을 세운 화석 김수연(90) 선생은 29살 때부터 한학을 가르쳐 왔다.

전통학문이 우리 시대에서 끊어지면 안된다는 철학에서 비롯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전통학문을 잇자며 단발령을 거부키도 했다.

화석 선생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4서3경을 배웠고 해학 이기 선생의 영향을 받아 신구학문을 익혔다.

서암 김희진 선생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고 이 계보는 간재 전우, 전재 임헌회, 매산 홍직필, 우암 송시열, 사계 김장생, 율곡 이이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성리학은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분류되며 화석 선생은 경기, 충청, 전라에 퍼져 있는 기호학에 심취했다.

유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이 학문만이 사회의 타락을 막고 구원을 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났다.

최근엔 인문학을 강조하고 전통문화가 대접받는 시대가 됐지만 당시로선 긍지와 자부심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60여 년이 넘는 세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한 평생 외길을 걸어온 것을 그야말로 질곡의 세월 그 자체였다.

비좁던 정읍 산외면을 정리하고 이곳에 서당을 만든 화석 선생은 제자 100여명과 함께 외로운 길을 걸어 왔다.

대지 800평, 건평 85평 규모의 서당은 크고 작은 방 26개로 100여명의 학생들이 기거할 수 있다.

규모로는 국내 최대 개인 서당이다.

이곳을 찾는 학생들은 한문교육이 필수인 한의대생을 비롯해서 전통학문연구자, 퇴직한 직장인 등 다양한 부류가 찾는다.

서울과 경상도 지역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순수학문에 대한 열정이 높은 지역으로 평하고 있다.

15년~20년 가까이 이곳에서 학문을 배우는 제자를 비롯해 아예 학성강당 근처로 이사를 온 제자들도 있다.

학생 때부터 공부를 하다 보니 성인이 되어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또 평생 공부해도 부족한 것이 한학의 특성인 만큼 지척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에서다.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

이곳의 운영철학이다.

사람이 많아 북적북적해도 항상 문은 열려 있다.

매일 와도 좋고 어쩌다 와도 괜찮다.

아예 눌러 앉으면 더욱 고맙다.

애써 가르쳤더니 부모가 데려가는 게 아쉽기만 할 따름이다.

효가 근본임을 가르쳤기 때문에 ‘자식 앞길 막는다’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수업은 철저하게 일대일 방식으로 이뤄진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화석 선생은 기척을 하고 수업에 들어간다.

그 다음은 가장 오래된 제자가 다른 제자를 맡는다.

또 그 제자는 자신보다 학문이 부족한 후배 제자를 가르친다.

선배가 후배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일종의 도제식 교육인 셈이다.

이렇게 배출한 제자가 5,000여명이 넘는다.

유교 경전인 사서삼경이 기본이고 오륜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소학이 기초과목이다.

학생의 능력에 따라 맹자와 중용, 시경, 서경, 역경 등 적절한 교재를 선택된다.

일반적으로 성인은 대학을 배우게 된다.

이곳의 규칙도 있다.

기상시간은 새벽 4시. 그날 배운 것은 무조건 암기할 것. 먹을 것은 본인이 해결, 오전 10시 서예쓰기 등 다양한 규칙이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혼선을 피하기 위해선 규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업료는 무료지만 식사는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재정적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다.

정식학교 인가가 나지 않아 행정의 지원은 일체 없다.

대안학교 허가를 두드려보기도 했으나 이 역시 여건이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늘이 준 소임으로 여기며 한 길을 걷고 있다.

60년 넘게 한학의 맥을 잇고 있는 화석 선생도 세월의 흐름을 비껴갈 수는 없다.

언제부터인지 귀가 들리지 않고 몸도 무거워졌다.

특별하게 아픈 곳은 없어 다행스럽지만 행동이 예전보다 못한 게 사실이다.

새벽 4시에 기상하지 말라는 가족들의 만류로 최근엔 아침 7시로 시간을 늘렸다.

교육은 가끔 참석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막내아들 청곡 김종회(52) 선생이 그 뒤를 잇고 있다.

20살 때부터 화석 선생 곁을 묵묵히 지켜온 그로선 선택이 없는 길인 셈이다.

청곡 선생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강조한다.

나를 먼저 다스려야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갖춰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에게 아쉬움을 표한다.

자기마음을 돌아보는 소양의 부족에서 생긴 결과란 것이다.

“경제가 급진적으로 발전해 행복지수는 꼴등이 되고 자살률은 일등이 되는 나라가 됐다.

모든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인데 상대적 빈곤감에 허탈감만 가득하다.

자신의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수기치인은 맹자의 ‘대장부’로 이어진다.

맹자는 일찍이 居天下之廣居(거천하지광거), 立天下之正位(입천하지정위), 行天下之大道(행천하지대도), 得志與民由之(득지여민유지), 不得志獨行其道(부득지독행기도), 富貴不能淫(부귀불능음), 貧賤不能移(빈천불능이), 威武不能屈(위무불능굴), 此之謂大丈夫(차지위대장부)라 했다.

천하의 넓은 집을 거처로, 바른 자리와 큰 걸을 걸으며,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하고, 그렇지 않으면 홀로 간다.

부귀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위세나 무력으로 굴복 당하지 않으니 이런 사람이 바로 대장부란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청곡 선생은 부친인 화석 선생을 대장부라 손꼽았다.

90평생 알아주는 사람 없이 자선봉사의 길을 걸었고, 뜻을 얻으니 제자들과 함께 했다.

부귀에 흔들리지 않았고 위세나 무력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물들이지 않고 꽃을 피운 연꽃같은 존재란 것이다.

이게 대장부이고 군자의 상이다.

“어차피 세상에 태어난 것,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았다.

인간인 지라 다양한 유혹이 찾았지만 흔들리지 않고 한평생을 보냈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대장부이며 나도 그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초심을 잃고 유혹에 둔감해지는 세상이다.

유혹에 흔들릴수록 부족한 자신을 되잡고 수양에 전념해야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환경의 중요성 때문이다.

일정부분 경지에 오른 사람은 더러움에 물들거나 혼탁한 곳을 일부러 찾는다.

본인이 물들지 않고 유혹을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장부는 그 곳에서 꽃을 피운다.

‘처오불염(處汚不染)’이다.

하지만 일반사람에게는 모든 게 ‘처오(處汚)’다.

수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절이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통하지 말라’는 공자의 말이 쉽지만은 않다.

때문에 열린 마음으로 부족한 자신을 인정하고 외물의 흔들림 없이 발전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곳이 바로 학성강당이다.

학성강당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귀를 쫑긋 세우니 ‘행복하게 잘 살자’란 평범한 말이 돌아온다.

욕심을 내리고 집착을 버리고 독서와 정좌를 하루 30분만 하자는 것이다.

소리 내어 독서를 하고 무념무상의 정좌를 습관화하게 되면 저절로 욕심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텅 빈 곳에서 밝음을 찾는 이치다.

이게 바로 화석 선생의 뒤를 이은 청곡 선생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처음엔 쉽지 않지만 여기서 얻는 기쁨은 만금을 줘도 바꾸지 못한다.

모든 국민이 행복하면 나라가 건강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학문은 실학(實學)이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허학(虛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 유학은 실용적 학문이라 배우고 행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는 학문이라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언제나 노력해야 한다는 청곡(淸谷) 김종회 박사./김현표기자

 

무위도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학문의 길 걷다

학성강당의 역사

 

1954년 화석 김수연 선생은 29살 때 김제군 성덕면 소석리에 학성강당을 세웠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과 새벽을 이용해 동네 학생들을 가르쳤다.

무위도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학문의 길을 가자는 뜻에서다.

1959년 정읍군 감곡면으로 서당을 이전한 후 1961년 김제군 성덕면 소석리로 다시 이전한다.

화석 선생의 어머니가 병환을 얻게 되면서 곁에 있어야 할 이유 때문이다.

이때 이름을 학성강당이라 칭했다.

이후 1990년 김제군 성덕면 대목리로 서당이 독립됐다가 1995년 정읍시 산외면 용두리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2001년 현재 위치인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로 자리를 잡게 된다.

대지 800여평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 5개 동이 들어섰다.

공사기간은 1년 5개월이 걸렸고 공사비는 제자들의 도움을 뿌리치고 자손들의 십시일반으로 완공됐다.

개인서당으론 국내 최대 규모다.
 

1926년 김제시 성덕면에서 출생한 화석 김수연 선생은 17세 무렵 사서삼경을 수학했다.

독학으로 영어와 중국어를 익혔고, 23세 때엔 시대의 부패상에 대한 모순에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키도 했다.

또 같은 마을 출신인 독립운동가이면서 호남 3걸의 한 사람인 해학 이기 선생의 영향으로 신구학문을 겸비하게 됐다.

동래 오익수 선생께 천문, 지리, 역학을 사사했고 서암 김희진 선생에게 성리학을 전수받았다.

1954년 학성강당을 설립했고, 30세인 1955년엔 강암 송성용과 김제 요곡제각에서 글씨를 연구하기도 했다.

60여년의 세월 동안 전통문화계승과 후진양성에 전념해 5,000여명의 제자를 양성키도 했다.

2003년 KBS 전북의 어른상, 2005년 국무총리상, 2013년 국민훈장 석류장 등을 수상했다.

아들 청곡 김종회 선생은 1965년 김제시 성덕면에서 출생했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문학석사, 원광대 한의학 박사를 취득했고 사단법인 학성강학 연구회 이사장, 허브넷 이사, 원광대 한의학과대 겸임교수, 백산상사 이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 아버지 화석 김수연 선생의 뜻에 따라 30년 동안 학성강당을 운영하며 무료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관공서나 기업, 교육, 문화 분야 각종 사회단체를 대상으로 전통문화 강의에 한창이다.

저서로는 청곡관견 전 2권(2003), 태격정로(2005), 수의시대, 대한민국이 미래다(2007) 등이 있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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