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예를 살펴볼까요?

《논어》 〈학이편〉에 보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라(無友不如己者)’는 구절을 들 수 있습니다.

無를 금지사로 해석한다면 온 세상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밖에 없는 성인은 고고하게 혼자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성인은 곁에 누가 있던지 마음의 동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교화시켜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줄 사회적 책임도 있지요.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라’고 해석하는 것도 공부를 시작하는 초학자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지요. 중국의 한 학자는 ‘자기만 못한 벗은 없다’고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모두 나보다 낫다는 말이죠. 세상 모두가 자신만의 장점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나는 모두에게 배울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서 배울만한 점이 있고 다 나의 공부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논어》 〈술이편〉에 ‘세 사람이 길을 걸어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으니(三人行必有我師焉)’ 좋은 것은 귀감으로 삼아 본받고 나쁜 것은 타산지석으로 삼아 고쳐야 한다는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연꽃도 마찬가지입니다.

썩은 진흙에 뿌리를 박고 있더라도 지극히 아름답고 청정한 모습의 꽃을 피워내지요. 그뿐인가요?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어 오히려 주위를 깨끗이 정화시킵니다.

이것이 친민(親民), 신민(新民), 치인(治人)의 뜻으로, 공자와 주자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숨은 뜻을 간파하지 못하면 유학은 그저 앞뒤가 꽉 막힌 융통성 없는 고지식한 학문에 그치고 맙니다.

유학의 기본정신인 수기치인(修己治人, 나를 닦아 남을 다스림)에서 수기(修己)만 될 뿐 결코 치인(治人)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마 공자와 주자가 깨끗하고 바른 곳에만 가고, 더럽고 문란한 곳에는 가지도 말 것이며, 나보다 못한 사람은 애초에 만나지도 말라고 했겠습니까?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기지요. 주자는 왜 숨은 뜻을 알 수 있도록 자세하게 주석을 하는 대신 단순히 ‘예가 아니면 보지 말라’고 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이미 깨달은 자는 사실 예가 아닌 것을 보아도 본 것이 아니고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받지 않지요. 그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은 외물(外物)에 마음이 동함이 없어 사실 예 아닌 것을 행동해도 자신은 아무런 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보고 따르는 아직 입지(立志)도 이루지 못한 후학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선배의 외물에 물들지 않는 행위를 좇게 됩니다.

선지자는 뒤를 따르는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후인들에게는 가르침이 됩니다.

후학은 선배가 하는 행동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따르게 되지요.그러므로 비록 종심의 경지에 들어 어떠한 외물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사회적인 예절이나 절차 등이 그저 뜬구름과 같더라도 예에서 벗어나지 않고 절차를 따르는 것은 자신이 아닌 후인(後人)을 위함이요, 진정한 각자(覺者)의 행동양식이라 하겠습니다.

실례를 하나 들어 보지요.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는 흰 옷을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립니다.

이는 단순히 우리 민족의 고유복식을 따르자는 것도, 부모님이 주신 머리카락을 보존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잠시 동안이라도 마음을 놓고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인 것이죠. 맹자가 ‘학문은 다른 것이 아니다.

놓아진 마음을 거두는 것 일뿐(學問之道無他라 求其放心而已矣)’이라고 한 것처럼 말이죠.흰 옷을 입고 있으면 앉고 일어서고 하는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닙니다.

또 머리에 치포관(緇布冠)을 쓰고 있으면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도 피울 수가 없지요. 이 모두가 공부를 함에 있어 기질을 바로잡기 위해 삼감(謹)과 공경(敬)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옷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죠. 공부하는 사람은 마음을 마음으로 잡아야 하지만, 아직 그러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에 외물로써 자기 마음을 검속(檢束)하려는 것입니다.

마음을 잡고 치열하게 공부하기 위한 방편으로 말입니다.

이미 깨닫고 뜻이 선 사람은 흰옷을 입지 않아도, 치포관을 쓰지 않아도 언제나 스스로 삼가고 조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흰 옷을 벗지 않고 상투를 자르지 않는 것은 마음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후학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해 주기 위함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 나중에는 후인에게 바른 길을 제시해 주기 위해서 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처음과 끝은 같을 수밖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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