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주자가 ‘예가 아닌 것을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라고 자세하게 밝혔더라면, 공부를 막 시작한 초학(初學)들조차 거침없이 마구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주자의 말씀인데!’라면서 말입니다.

이래서야 도저히 배움을 이룰 수 없겠죠.그래서 뜻이 선 선각자들은 ‘예가 아닌 것을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내면의 이치를 알면서도, ‘예가 아니면 보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일차적 단계의 수준은 꽉 막아서 초학들로 하여금 삼가게 하지만, 이차적인 뜻은 오히려 사방으로 뚫려 막힘이 없고 지극히 융통적인 무상의 경지라 하겠습니다.

이제 주자의 고뇌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시겠습니까? 내면에 담긴 진정한 뜻은 모두 간파하였어도 ‘물(勿)은 금지하는 말’이라고 주석할 수밖에 없었던 그 고뇌와 사색을 우리는 다시금 깊이 새겨 봐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미묘한 부분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다면, 유학은 영원히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학문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자의 본뜻은, 처음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다가 수십 년 공력이 쌓여 제대로 안 다음에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차적인 수준의 말밖에 할 수 없다는 과정을 유도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정(正)· 반(反)· 합(合)의 논리입니다.

어떤 이론이 세워지면 그에 반하는 논리가 나오고 결국 다시 합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죠. 시작점이 0이라면, 반은 180도이고, 합을 이루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이치입니다.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왔지만 360도를 돌았으니 차원이 다른 것이죠. 이는 음이 극에 이르면 양이 된다는 음양의 이치나 ‘하나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는 논리와 같은 것입니다.

결국 처음과 끝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차원은 다르지만 드러나는 행동은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는 이 무상의 경지를 이해한다면 동양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학은 자신을 철저하게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남에게 미치도록(及) 하는 학문입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대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제대로 깨달아 보겠다고 혈연관계를 비롯해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혼자 산에 올라가는 여타 학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설사 그처럼 극단적인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어 남에게까지 미치고자 하더라도, 유학은 절대로 현실에서 벗어나거나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살더라도, 그 속에서 행복을 찾고자 한 걸음 한 걸음 정진해 나가는 것이죠.‘사물잠’의 이치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이 올바른 뜻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진정 옳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개인의 학문적 완성은 물론 유학의 발전도 쉽게 이뤄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태극의 자리, 우주심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점은 태극의 자리, 곧 중화(中和)입니다.

다른 말로는 천지의 마음, 즉 우주심(宇宙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인간의 감정이 움직이기 전의 상태를 중(中)이라고 하는데, 누구라도 웬만큼 공부를 하면 이룰 수 있습니다.

학문을 하든지, 참선을 하든지 성성불매(惺惺不昧)의 상태로 훤히 깨어 있어 자신의 마음과 우주심이 같아지는 상태가 중인 것입니다.

한편 마음이 발현되어 실제 일에 응했을 때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 즉 모자람도 없고 지나침도 없는 상태를 화(和)라고 합니다.

완벽한 화의 자리는 오로지 성인(聖人)과 하느님만이 다다를 수 있습니다.

화를 이루는 것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음악으로 이루면 화음(和音)이고, 인간의 마음이 천지우주와 화합하면 화인(和人)이 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곧 성인인 것이죠. 학문이든 예술이든 의술이든 간에 한 분야에서건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진다면 그 분야에서는 성인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처럼 정말 좋은 것이 없지만, 화를 이루기란 정녕 어렵습니다.

그런데 딱 들어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임의대로 들어맞는다고 하여 화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우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화에 이르렀는지를 알려면 반드시 중이 서 있어야 합니다.

중은 치우침 없이 중심이 잡혔는지를 가늠하는 저울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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