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 서로가 내 부모 잘 섬기고 내 자식 잘 키우기 위해 돈을 벌고, 여력이 있으면 지역사회를 위해, 또 국가를 위해 상생하는 경제활동을 구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욕은 최대한 줄이고 공욕을 극대화 하는 것,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할 방안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최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공리를 근본으로 정책 입안을 하거나 거취를 결정하다보면 상기한 바와 같이 대중 정서에 반하여 신뢰를 잃는 일이 벌어질 수 있지만, 의본주의는 대중의 선한 본성에 기반 하기 때문에 지키면 지킬수록 사회가 이로워지고 서로가 행복해지는 결과를 양산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실제로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6.25나 동학혁명과 같이 통치 질서나 법이 무너진 상황에서 그전의 흉년 때나 먹고살기 어려웠을 때 소작인에게 덕을 베풀어 대욕을 실천했던 부잣집들은 온전히 민초들이 스스로 그들을 지켜줬던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자신의 부만 생각하고 농민은 굶어죽어도 좋다는 소욕을 실천했던 지주들은 민초들이 나서서 먼저 죽여 버렸지요. 이는 위에서 설명한 대욕 사상, 즉 의본주의 사상이 실제로 이루어 질수 있음을 열어 보이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무엇이 올바른 돈벌이인지, 무엇이 올바른 쓰임인지 정확하게 아는 동시에 의에 맞는 부에 대해서 만족할 줄 알려면 천리에 대한 깨달음, 즉 본성의 회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에서는 평천하(平天下)가 나라를 잘 다스림에 있다고 강조하며, 나라를 잘 다스리는 방법 가운데 재물을 벌고 쓰는 방법에 대해서 논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서 일관되게 근본으로 삼는 것이 바로 ‘덕(德)’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천리가 사람에게 부여되어 그 자체로 선한 것, 곧 명덕(성품)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학》에서는 군자의 재물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군자는 먼저 덕을 삼가니, 덕이 있으면 사람이 생기고, 사람이 있으면 나라를 얻게 되고, 나라를 얻으면 재화가 발생하고, 재화가 있으면 소비가 생길 수밖에 없다(是故君子先愼乎德有德此有人有人此有土有土此有財有財此有用).’  나라를 얻은 자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위해 노심초사하지 않는 법이요, 나라를 얻을 수 있는 자는 사람을 얻은 자요, 사람을 얻을 수 있는 자는 덕을 삼가는 자입니다.

따라서 재화를 논함에 있어서 ‘덕’, 즉 본성의 회복이 항시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고사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君은 以民爲天이요 民은 以食爲天이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하늘로 삼는 백성은 먹고 사는 것을 가장 급급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민생에 있어 재화, 즉 경제활동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항시 상쟁하고 있는 인간이 ‘以利爲利(이로움으로써 이로움을 삼으면)’면 모든 행위의 판단 준거가 본인에게 돌아오는 이익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인간성이 말살됩니다.

공리주의의 근본적 문제점은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이죠. 최대 다수의 행복이라는 것이 ‘칠정이 추구하는 만족,’ 즉 말초적인 ‘실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쉽게 사사로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인의 재화에 대한 태도는 단호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합니다.

  성인은 이로움으로써 이로움을 삼지 않고(不以利爲利) 의로서 이로움을 삼는다(以義爲利).  성인은 이로움을 단순히 자신에게 돌아오는 실리의 크기로만 판단하지 않습니다.

의(義)에 맞는 것, 그것이 이로움(利)이라는 것이지요. 재물도 의에 합당하다면 많이 벌어야 마땅하고 의에 맞지 않는다면 터럭 끝만큼도 바라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이 성인의 마음입니다.

덕(德)을 존숭(尊崇)하기에 실리를 등한시하는 것이 아니라 덕을 밝혀 선후경중(先后輕重)의 사리(事理)를 분간할 수 있는 명확한 준거를 확립하고 그에 맞게 재화를 버는 것, 그리고 ‘정당한 돈’을 벌어 적재적소에 알맞게 쓰는 것, 의본주의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그렇게 실천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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