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를 깨우쳐 성품대로 행하는 성인은 마치 천지가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성품과 천지만물의 이치가 똑같으니 사람을 사랑하듯 미물이나 무생물조차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리고 의본주의가 바로서려면 이런 인자(仁者)가 위정자(爲政者)가 되어야 함은 물론, 우리 모두가 이런 각자(覺者)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앞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성인의 마음을 몸소 실천했던 옛 선조들의 예를 들어보자면, 예전의 선비들은 짚신을 엮어 신을 때 반드시 서너줄로 꿰어 신었습니다.

바닥을 여섯 날로 꿰어 신으면 쉽게 헤지지 않아 오래 신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밑바닥이 너무 촘촘하게 되어 길을 걸을 때 자칫 미물을 죽일 수 있을까 걱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지팡이도 ‘지팡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령(注鈴)이라고 하였는데, 지팡이 끝에 방울을 달아놓아 지팡이를 땅에 짚을 때 울리는 방울소리를 듣고 주변 생명들이 피해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지팡이는 항상 발 보다 앞서 딛게 된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었죠. 이렇게 예전 선비들은 ‘인(仁)’의 마음을 초목금수(草木禽獸)에까지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또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의본주의는 묵가(墨家)가 주장했던 겸애주의와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묵적(墨翟)은 세상의 모든 혼란을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자신만을 아끼는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양주(楊朱)의 위아론(爲我論), 즉 내 털 하나를 희생시켜 천하를 구원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정반대의 이론을 펼쳤으며 유가의 친친주의(親親主義)도 배격하였습니다.

친친주의의 경우 사랑의 실천을 친한 사람으로부터 소원(疏遠)한 사람에게까지 차등을 두어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분쟁과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본 것이죠. 만약 모든 사람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 피아(彼我)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면 서로를 위해(危害)하는 일이 일어날까요?이렇게 묵가는 남을 나와 같이 사랑하는 일이 이(利)의 극대화를 위하는 방편이라고 여겼습니다.

묵자는 남을 미워하고 해롭게 하려는 데서부터 천하의 해(害)가 생기고, 남을 사랑하고 이롭게 하려는 데서 이(利)가 생기기 때문에 이(利)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겸애를 실천해야 한다는 공리주의적 논법을 써서 이야기 합니다.

따라서 묵가에서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나의 이익은 이기심의 발로(發露)이기 때문에 절제하는 반면 공공의 이익은 겸애의 결과로 보았던 것이죠. 이렇게 보면 겸애주의는 의본주의와 아주 유사해보입니다.

만물이 천리를 부여받아 평등하기 때문에 똑같이 사랑한다는 점에서, 또 공익을 최대한 키우고 사욕을 줄인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공맹(孔孟)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의본주의는 사랑의 실천 또한 의에 맞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의에 맞는 사랑의 실천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학문의 체계에 대해 밝혀 놓은 《대학》의 구절을 다시금 빌려보도록 하죠.   만물에는 근본과 말엽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먼저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 곧 도에 가까울 것이다.

(物有本末하고 事有終始하니 知所先後면 卽近道矣리라)   도(道)라는 것은 성품을 따르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도를 실천하는 방법의 시작은 분명 만물의 선후(先後)와 경중(輕重)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성품대로 실천하는 것이므로 사랑의 실천 또한 선후와 경중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물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상황에 맞게, 의에 맞게 실천해야 하는 것이죠.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내 아이와 친구의 아이가 물에 빠졌다고 가정해보지요. 지금 당장 구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두 아이를 모두 구하려고 든다면 나를 포함한 세 명이 모두 죽을 것이 확실한 상황이라 오로지 한 아이만 구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구할 것 같은가요?답은 당연히 내 아이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남의 아이를 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어쩔 수 없는 통한의 선택이었을 뿐이죠.- 다음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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