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에서는 이런 차별적인 사랑을 ‘천리’로 받아들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도리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랑의 실천은 반드시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와 자식에게 그 마음을 실천하고, 나아가 친구와 웃어른께 실천하고, 사회 그리고 국가에까지 미루어 나가는 것이 순서가 됩니다.

따라서 내 가정을 잘 돌보지 못하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내 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고, 내 자식을 잘 돌보지 못하며, 내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지 못하고, 내 친구 사이에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국민들을 받들어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학문의 체계는 반드시 나를 닦는 것을 근본으로 시작하여 가정, 그리고 사회, 국가에 미치는 것이 올바른 순서가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단어의 의미 없는 병렬식 나열이 아니라 반드시 순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의본주의에서 주장하는 공욕은 묵가와 달리 이기심에 기반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기심은 단순히 오욕을 채우려는 이기심이 아니라 천리에 부합하는 이기심이지요.천리에 부합하는 이기심이란 내가 잘 되어서 내 부모를 잘 섬겨야겠다는 마음, 내 형제를 도와주겠다는 마음, 여기서 나아가 내가 속한 지역 사회·국가를 이롭게 하겠다는 상생의 마음입니다.

다만 그 첫 번째 단추가 나를 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죠. 내가 여건이 되어야 나의 잘 살고자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을 도와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의 실천과 욕심의 충족은 이렇게 추기급인(推己及人), 즉 나로부터 시작하여 내 마음을 다하여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도로써 실천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인의 마음은 천지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사랑의 실천은 오직 의에 맞게 실천할 뿐입니다.

의에 맞는 사랑의 실천이라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의 가족과 같이 친한 이에 이르고 사회와 국가에까지 이르는 차등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을 짓기 위해 살아있는 생명인 나무 하나를 베는 행위도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도 악독한 한 사람이 있어 인륜을 어지럽히고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친다면, 그리고 개도의 희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면 위정자는 더 큰 사회의 이익을 위해 뼈아픈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오직 어진사람이어야 (개도의 여지가 보이지 않고 사회에 악독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 나라 안에 두지 않을 수 있으니, 이는 오직 어진 사람만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람을 진실로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랑하기 때문에' 죽이는 것, 말장난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인자(仁者)의 마음입니다.

비록 다수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이 희생한다는 명제만 놓고 본다면 이는 또한 공리주의적 입장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행위의 근본 마음자리가 다른 것입니다.

인자(仁者)의 마음은 악독한 그 한 사람조차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대의(大義)를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단호하게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의(大義)’란 다수의 행복·다수의 이익에 따라 결정되는 가변(可變)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자연의 이치, 순리를 말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수 천 년 간 이어져온 동양의 지혜, 의본주의   하버드 대학생들이 20년 동안 최고의 명강의로 꼽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한 강의는 최근에 우리나라에도 동영상이 배포되고 책이 출간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만큼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정의의 실현에 대한 갈망은 은연중에 우리 정서에 깊게 깔려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역사적으로 사회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해 여러 서양 철학자들이 제시한 주장의 핵심을 살펴보고,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그 정치철학이 과연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올바른 철학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해줍니다.

나아가 여러 사상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진짜 ‘정의’가 무엇인지 본질을 탐구하게 되죠.       -다음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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