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열성팬 만든 한류 원조 아이 둘의 이웃집 젊은아빠 스승 조훈현이어 최정상 확실히 이기는 수를 둬

우리 동네 국회의원, 시의원 이름은 몰라도 아마 국민 대부분이 ‘이·창·호’ 국수 이름은 알 것이다.
바둑 한 분야에서 이창호(41) 국수는 지난 십 수년간 독보적, 국보적, 세계적 인물로 불리어 왔다.
전국에 산재한 수 많은 기원과 거의 1,000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되는 바둑 인구 사이에서 이 국수는 ‘살아있는’ 레전드다.
굳이 통산 몇 승을 거뒀고 몇 개의 타이틀을 가졌냐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이 국수에 대한 ‘무례’일 것이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인터뷰가 끝나고 이동하는 중에도 수많은 시민이 이 국수를 쳐다 본다.
처음 인터뷰를 시작할 때보다, 인터뷰가 끝난 이후에 이 국수의 ‘인기’를 직접 실감하게 된다.
실제, 이 국수의 인기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서 더 유명하다고 한다.
중국에는 9,000만명으로 추산되는 바둑 인구가 있는데 심지어 바둑 애호가인 시진핑 주석도 이 국수의 열성 팬으로 알려진다.
한 마디로 중국에 불고 있는 한류의 원조는 이 국수다.
전주가 낳은 신산(神算) 이창호. 추석 연휴 바로 전날인 지난 24일 오후 5시, 서울 강남구 L백화점 뒤에 있는 아늑하고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서 이 국수를 만났다.
참고로 우리나라 정상급 프로에게는 국수라는 칭호가 명예스럽다고 한다.
/편집자주

 

“국수님, 이 근처에 자주 오시나 봐요?”

“네. 집이 바로 저 위여서 여기 백화점도 오고 장 보러도 옵니다.”

“그런데, 길에서 뵈면, 이 국수님인지 잘 모를 수도 있겠네요. 평상시에도 이렇게 편한 복장을 하세요?”

“네”(웃음).

면바지와 재킷이 편해 보였다.

어깨에 둘러 맨 백과 손에 들고 있는 하얀 생수병도 잘 어울린다.

전 세계에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이창호 국수지만, 막상 옆에서 보면 평범한 이웃집의 ‘젊은 아빠’ 같이 자연스럽다.

“아이가 둘 있는데, 4살하고 이제 7개월이에요. 같이 놀아주고, 그러면서 시간을 많이 보내요.”바둑 기자 출신의 이도윤씨와는 2010년에 결혼했다.

“연애 결혼을 했어요. 마음이 잘 맞아요.” 따뜻한 주말 오후, 아이 둘과 거리를 산책하는 이창호 부부의 그림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우리나라 현대 바둑하면 호남을 빼놓을 수 없다.

바둑계에서는 흔히 ‘조남철-김인-조훈현-이창호 시대’라고 말한다고 한다.

한 시대를 대표한 바둑계의 1인자이자, 거목들이다.

물론 이창호 국수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창호 이후에는 아직 1인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의미다.

우리 바둑의 개척자이자 현재의 체계를 구축한 이는 고(故) 조남철 선생이다.

부안 출신으로 1968년 제1회 국수전을 시작으로 1977년 9회 대회까지 국수를 지켰다.

조남철 선생에 이어 전남 강진 출신의 김인 시대가 열렸고 그 이후에는 다시 전남 영암 출신의 조훈현 시대가 개막됐다.

그리고 조훈현의 내제자인 이창호 국수가 그야말로 청출어람(靑出於藍), 1990년대 후반 이후 국내는 물론 세계 최정상 자리를 지켰다.

이 국수를 바짝 추격했고 라이벌로 꼽히는 이세돌(33) 9단도 전남 신안 출신이다.

호남 출신이 전 세계에 국위선양, 한국 바둑을 알렸고 지금도 한국 바둑의 중심 축이다.

특히 이창호 국수는 세계 최정상 자리를 오래 지키면서, 축구와 마찬가지로 중국 바둑계에선 공한증의 대상으로 불렸다.

그 만큼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존엄’을 인정받는 프로기사다.

이 국수는 여러 별칭을 갖고 있지만 아무래도 ‘돌부처’가 가장 어울린다는 평이 많다.

기풍이 흔들리지 않는다, 안정적이다는 뜻이다.

이 국수의 동생 이영호씨는 “형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가장 안전한 길,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수를 둔다는 것. 그러나 몇 년 전부터는 기풍이 전투적으로 바뀌었다는 평도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질문보다는 사실, 독자들은 이게 더 궁금해요.

오랜 기간을 세계 최정상 자리에 있었는데, 혹시 한 두 번 자리를 내 주면서 슬럼프를 겪은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극복했나요?” “저는 슬럼프는 없었다고 봐요. 슬럼프라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이 국수는 이 질문에 별다른 생각 없이 바로 답변했다.

주요 대국에서 패했다고 해서 슬럼프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그야말로 ‘하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산이라는 이 국수에게 이런 질문을 한 건, 혹시 슬럼프가 있었으면 어떻게 헤쳐 나왔는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국수는 “딱히 슬럼프라고 할 게 없어요. 저는 저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인물도 나오는 겁니다.

다른 사람도 열심히 자신을 갈고 닦아서 오늘에 이른 것이지요.” 결국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자신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스스로 잘 다스리면 된다, 그런 의미인 것 같다.

 



-세계 최정상인데 따로 공부도 합니까?“그럼요.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

주요 대국을 복기하거나, 연구합니다.

새로운 것을 찾는 노력도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바둑과 함께 하셨는데, 조금 벗어나 보고 싶은 적은 없었나요?

“아니요.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기분이 조금 우울하거나, 고민이 있다면 어떻게 푸세요?

“가능하면 마음 편하게 생각합니다. 걷거나 산책을 하면 기분이 나아집니다. 책 보는 것도 좋아해요. 테니스도 좋아하는 운동 중 하나입니다.”

 

-한 분야에서 이 국수님처럼 일가를 이루면, 정치 해보라는 권유도 많이 있을 텐데요?

“정치하고 저는 안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제 분야가 있고, 정치는 또 정치를 더 잘 아는 분들이 해야지요.”

 

-앞으로의 목표는 뭘까요?

“목표라기보다는 좋은 바둑을 두고, 좋은 가정을 이루는데 더 노력할 겁니다.”

 

-전주는 자주 가세요?

“이사를 와서 자주는 못 가지만, 가끔 갑니다. 요즘 전주 한옥마을이나 전주 먹거리가 많이 알려져서 좋아요.”

이 국수와 인터뷰하기 전, 바둑계 인사들로부터 “이 국수는 매우 과묵할 것”이라는 평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인터뷰가 끝나고 생각해 보면, 과묵하다기보다 본인의 생각을 ‘절제’하고 정리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

괜시리 의미 없는 말을 던지기 보다는 꼭 필요한 말을 군더더기 없이 하는 것…. 이 국수와의 인터뷰는 마치 한 편의 대국을 옆에서 지켜보는 듯 차분했다.

/서울=김일현기자 kheins@

 

▲이창호 프로필

-1975년 7월, 전주 생

-이재룡, 채수희씨의 3남 중 차남

-1982. 전주교대부속초 1학년 때, 할아버지 이화춘씨로부터 바둑을 배움

-1984. 조훈현 9단의 내제자로, 한국기원 연구생이 됨.

-1986. 최연소 입단 기록 2위

-1988. 최연소 타이틀 획득 [제8기 KBS바둑왕전]

-1991. 충암고등학교

-1992. 최연소 세계챔피언 [16세 6개월, 제3기 동양증권배]

 

<주요 기록>.

-통산최다연승 [41연승]

-통산최고승률 [75승 10패, 88.24%]

-왕위전 12연패 [1996년 30기~2007년 41기]

-국내 16개기전 싸이클링 히트 [1994년, 제18기 기왕전 우승]

-최다관왕 기록 [13관왕, 1994년]

-문화체육부 은관문화훈장 서훈 [2등급, 1996년]

-5년 연속 최우수기사 [1995~999년]

-세계대회 그랜드슬램 [동양증권배, LG배, 삼성화재배, 후지쓰배, 응씨배, 춘란배, 토요타덴소배]

-1991~1992, 1995~1999, 2001, 2003, 2005, 2009 바둑대상 최우수 기사상 [11회]

-2010년3월 기준 통산 140회 우승 [비공식 기전 타이다배, 세계최강결정전 포함]

 

<한국기원 홈페이지 baduk.or.kr, 이창호 공식사이트 leechangho.com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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