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태문 전주남부교회 목사

시대 변화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그 속도에 익숙하기가 너무 벅차다.

그래서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저만치 앞서가는 변화를 바라보며 벅찬 숨을 몰아쉬고 한숨을 내쉰다.

아니 어쩌면 앞서가는 변화를 따라가기 싫은지도 모른다.

차라리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곳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의 노랫말이다.

지나간 먼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가사를 생각하며 노래를 읊조리면 마음속이 저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짧은 노래 가사를 통해서도 마음에 감성을 찾아갈 수 있는데 과연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도 이러한 감성이 살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날로그의 시대를 넘어서 이제는 디지털 시대이다.

디지털은 물질의 특성을 0과 1의 조합으로 바꾸는 과정이자 그 결과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것이 디지털의 정의이지만 필자 역시 이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렵다.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디지털은 조금도 남거나 모자라지 않고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아날로그가 가지고 있는 여유나 모자람이 없다.

그래서 냉철하고 날카롭기까지 하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넓은 의미에서 이성과 감성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이성만으로는 차가움이 있지만 좀 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감성에는 따뜻함이 있는 반면 지나친 감정에 치우쳐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래서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룰 때 따뜻하면서도 합리적인 판단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시대가 점차 감성을 상실해 가고 이성만 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에 씁쓸함이 있다.

이성은 자기 편향적 치우침이 있을 때 자신만을 위한 합리성을 추구하게 되어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배려하는 마음이 없게 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감성이 없다면 상호간에 가져야할 의무와 책임만 남는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헌신과 수고가 자녀에게는 은혜도 될 수 있고 권리도 될 수 있다.

부모의 헌신을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는 따뜻한 사랑으로 받으면 그것은 은혜가 된다.

그러나 부모의 헌신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신을 존재하게 한 부모의 당연한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권리가 된다.

자녀들은 이러한 은혜와 권리 사이에서 살아가게 된다.

부모들은 은혜로 치우치게 되고 자녀들은 권리로 치우치게 된다.

그래서 서로가 서운하고 야속하게 될 수 있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와 ‘내가 좀 더 부유한 부모에게서 때어났더라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진실’은 참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실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해서 달라진다.

아무리 진실이라고 해도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사실이 되고 믿지 않아 받아들이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우리의 생활은 실제로 이러한 상황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법에도 인정이 있다’고 하는 말은 법은 이성이지만 인정은 감성이다.

법의 냉혹함만이 전부가 아니다.

법으로만 판단하기 어려운 안타까운 상황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양식이 없어 먹지 못하여 모유를 주지 못하는 아이 엄마에게 갓난아이의 배고파 우는 소리는 고문과 같다.

마트에 넘쳐나는 분유는 아이 엄마를 범죄자로 만들게 된다.

법은 아이엄마를 정죄하지만 인정은 법만으로 정죄하기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어서 선처를 베풀게 한다.

이처럼 디지털의 세계와 아날로그의 세계는 이성과 감성의 차이를 가지게 한다.

이 시대는 디지털에 의해 점령된 시대라 할 수 있다.

청소년들은 같은 장소 있으면서도 스마트 폰으로 대화를 한다.

가정에서도 가족 구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대화하는 것이 왠지 익숙하지 않고 어색하다.

각자가 스마트 폰이나 인터넷 서핑을 한다.

모든 기기들이 아날로그적 기능을 벗어버리고 디지털로 바뀌었다.

그만큼 감성적인 환경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온라인 게임 등 디지털 게임 등이 청소년들에게 생각을 깊이 하지 않는 충동적 인격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팝콘브레인이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되는데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첨단 디지털기기에 몰두하게 되면서 현실 적응에는 둔감한 반응을 보이도록 변형된 뇌구조를 일컫는다.

순식간에 튀어오르는 팝콘처럼 즉각적인 현상에만 반응할 뿐 다른 사람의 감정 또는 느리고 무던하게 변화하는 현실에는 무감각하게 된다는 의미다.

최근 부천에서 커플에 대한 폭행 사건이 있었다.

어쩌면 디지털시대가 만들어내는 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자람도 있고 남음도 있는 아날로그적 감성의 사고가 그리워진다.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 할지 모르지만 인정을 베푸는 아날로그적 사고가 더 따뜻함을 느낀다.

지난 추석 명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을 찾아 대 이동을 하였다.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과연 무엇으로 채워져 있었을까? 책임과 의무였을까?

아니면 인정과 그리움이었을까? ‘고향의 봄’처럼 모두의 마음 안에 따뜻한 감성으로 채워져 있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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