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감각으로 8년간 '발상의 전환' 시도 또 시도
젊은 감각으로 8년간 '발상의 전환' 시도 또 시도
  • 조석창
  • 승인 2015.10.1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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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시군지부에 힘실어주고 예술간 보이지않는 갈등해결도 문화예술 현안해결 정신없지만 그림그리며 활력충전-변화노력
▲ 항상 마음이 젊고 새로운 걸 추구하는 것이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며 상징아리는 선기현 전북예총회장.

선기현(58) 한국예술인총연합회 전북도연합회장(전북예총)은 지난 8년 동안 변화와 화합, 소통을 앞세우며 전북 문화예술계를 이끌었다.
젊은 감각과 패기로 무난하게 전북예총을 운영했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변화의 필요성에 힘을 얻은 그는 세대간 화합에 힘을 기울였고, 특히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시군 지부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정적인 예술과 동적인 예술간 보이지 않는 갈등도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여기에 예술인 일자리, 복지문제를 비롯해 도민들이 충분한 문화향유를 할 수 있는 기반 마련에도 놓치지 않았다.
일정부분 목표를 달성했지만 만족스럽지는 않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실사구시(實事求是). 자신을 이끌고 믿어왔던 문구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선기현 회장을 만나봤다.
/편집자주

   

 

“바쁘긴 하다.

어떤 날은 개인적 시간이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겉모습은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 실속 없는 삶과 같다.

내 마음의 내실을 얻는데 만족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지난 8년은 정신없이 보낸 시절이었다.

산적한 문화예술계 현안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도내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나 축제장에도 얼굴을 보여야 한다.

한 단체의 수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힘에 부칠 법도 하다.

이런 그를 바로 잡아주는 것은 뭐라 해도 그림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전북예총 활동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고 고백한다.

그림은 그에게 삶의 자양분이자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전북미술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공식적으로 외부활동을 시작했다.

그림이 빵으로 환산되는 구조가 아니다보니 그간 고생은 말로 하기 힘들다.

돈으로 환산되지는 못하지만 그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다행스럽게 설치나 현대미술 계열에서 활동하다보니 운신의 폭은 훨씬 넓은 편이다.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고자 한 노력도 일정 부분 효과를 보고 있다.

대부분 아티스트들은 자기 예술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심하다.

하지만 백남준의 경우 이것저것 가져다 결과물을 내놓아 관심을 받았다.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해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선 회장이 강조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작품이 무분별하고 일관성 없다는 지적도 있지만, 보장된 자유를 최대한 활용해 모든 것을 표현코자 한 것이 그의 작품세계다.

모든 소재가 그림 속에 있고 자신의 삶이다.

타고난 그림쟁이란 말이 수긍이 간다.

전북예총 회장을 맡은 지 어언 8년이 됐다.

전북미협회장 때도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변경하고픈 목표가 생겼다.

8년 동안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많은 시도를 했다.

하지만 50년 넘게 오래된 배의 기수를 돌리는 것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최근 건조된 신형이라면 간단하게 방향전환이 가능하지만 오래된 전북예총호는 기수를 돌리기는 커녕 직진 자체도 힘든 지경이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인 셈이다.

지회를 늘리고 국제교류에 힘쓰고 예술인 복지에 힘을 기울였다.

한 번씩 모든 문제를 건들고 싶었다.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해야 할 임무라 생각했다.

기성세대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일단 순항을 했다는 데 만족하고 있다.

전북예총 회장 선거에 나오기 직전부터 가졌던 생각이고 지금도 변함은 없다.

당시 40대 기수를 내세웠고 최연소 예총회장이란 말도 나왔다.

“순수예술에 젊은 아티스트가 없는 현실이다.

젊어질 필요가 있었다.

예술인 복지를 위한 환풍구 역할 등 역할부여에 힘썼으나 시원스런 결과를 얻지 못해 아쉽다.

어느덧 나이를 먹은 내 자신을 보았을 때 더욱 아쉬움은 크다.”

전주 출신으로 교직에 계신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당시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 ‘환칠’한다는 경멸스런 말이 나올 시기였다.

아들이 그림을 그린다고 하자 거세게 반대할 만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색을 다루는 것에 매우 민감했다.

사람이 비정상이 될 경우 색 구분이 희미해지며 구별을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반대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색을 다루는 것은 위험스럽고 천시 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캔버스며 미술 도구를 없애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재학 시절 미술부 활동을 꿈도 꾸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타고난 끼를 숨길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4개월 남기고 선생님의 양해를 얻고 서울로 훌쩍 떠났다.

그림 공부에 대한 열망을 이루기 위해서다.

그림의 기초를 배우고 원광대 미술교육학과에 진행했다.

대학 시절도 좋지는 않았다.

틀에 박힌 도식적 교육이 싫어 휴학 복학을 반복했다.

7년 만에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오니 더욱 막막했다.

‘그림은 이렇게 그려야 한다’는 공식을 깨고자 1983년 뜻있는 화가들과 함께 쿼터그룹을 창단했다.

출신학교를 불문한 미대 졸업생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새로운 길을 걷고자 만들어졌다.

탈장르와 혼합매체 등으로 현대미술의 가능성과 정체성을 확장하고 한 쿼터그룹은 활발한 활동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전북내에서 최장수 그룹이란 타이틀도 가지게 됐다.

구상작가인 김두해 전 전북미협회장과 사진작가인 이흥재 전 전북도립미술관장과 함께하는 3인전은 그에겐 또 다른 낙이다.

전북 미술계를 선도하는 이들은 1988년 첫 전시회를 시작으로 해마다 12월에 3인전을 진행하고 있다.

외도도 했다.

1985년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은 꿈에 충무로를 찾았다.

2년 만에 한계를 느끼고 패션 관련 무역회사에 다니기도 했다.

회사를 통로로 해 뉴욕으로 진출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함이다.

하지만 세상은 항상 내가 원하는 데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좌절감을 느끼고 낙향했다.

처음 한 일은 관주도로 움직이고 있는 미술계에 대한 반항이었다.

1995년부터 6년 동안 전북미술협회장을 맡으며 전북미술대전을 미술인들이 직접 해야 한다며 미술협회 사업으로 돌리기도 했다.

전북예총 회장에도 도전했지만 1차는 고배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2번째 도전 끝에 전북예총 회장에 취임했지만 이 역시 만만치 않았다.

10개 협회, 10개 지회가 항상 자신을 관심 있게 지켜봤고, 협회마다 각각 다른 속성도 앞서서 해결해야 했다.

예술인들의 높은 자존심이 상충될 경우 유격역할도 본인의 몫이다.

전북예총 50년사 발간, 전북 예술인 대회, 예술강사제 운영, 파랑새 프로젝트, 예총지 발간, 오지마을 문화투어, 호영남교류사업 등 많은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예산확보, 스폰서, 예술상, 장학금 등 예총회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개인시간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작업 활동은 게을리 하지 않아 틈틈이 개인전을 해 왔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진즉 물러났을 것이다 8년 간 전북예총 수장역할을 했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다.

단기적인 것보다 중장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예술인 복지문제는 무엇보다 시급하다.

14개 시군에 10개 지회만 있는 것도 당면과제다.

나머지 4개 지회가 완성돼야 어엿한 예술인총연합회가 구성이 된다.

또한 예술인들을 위한 별도의 예총회관 건립도 추진해야 한다.

선배들이 그림을 팔아 십시일반 모은 성금으로 전북예술회관이 만들었지만 내쫒겨진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선배들이 전북예술회관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후배들이 예총회관 건립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작업은 양심의 허락이며 자신의 본질이다.

작업을 하지 않는 것은 탈을 쓰고 다니는 것과 같다.

작가가 글을 쓰지 않고 외부활동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강은 좋다.

술자리 따라는 가되 절대 앞서지 않는다.

철이 들었다고 덧붙인다.

자칫 가정에 소홀할 수 있다.

아이들은 성장해 집을 떠났고 빈 집은 부인이 혼자 지키고 있다.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이들은 예술계와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다.

부모를 닮았다면 타고난 피를 속일 수 없지만 강제할 일도 아니다.

경제적 곤란은 항상 넘어야 할 산이다.

경제와 예술은 따로 구분할 수 없는 한 몸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특히 현대미술 그것도 비구상 작업을 하니 작품이 잘 팔리지 않는다.

이해하기 힘들고 보는 것조차 심란하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고독하고 외롭고 잘 섞여지지 않는 내용의 작품들이다.

팔릴 리 없다.

생계를 위해선 무대미술, 실내인테리어 등 돈되는 일도 마다치 않았다.

돈을 벌어야 자신의 예술세계를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부인은 미술교사로 최악의 상황은 면해 왔다.

다행스럽게 외길 고집이 최근엔 인정을 받고 있다.

이해하기 힘들고 보는 것조차 불편한 작품이지만 한 길을 파고드니 간간히 판매가 되고 있다.

오늘 한 일을 내일 후회하지 말자. 본인의 좌우명이다.

항상 사람같이 살고 곧 후회할 일은 애초부터 하지 말자는 것이다.

책임감 있는 인생이란 것이다.

자서전도 생각하고 있다.

1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화장실 가는 시간이 3분 걸릴 때 펴낼 예정이다.

 내년 2월이면 임기가 만료된다.

주위에선 3선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재도전 의사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나는 항상 마음은 젊다.

그리고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싶다.

이것이 내 인생이며,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고 또 나를 상징해주는 캐릭터이다.”

 

 

 

선기현 회장이 걸어온 길

 

전주출신인 선기현 회장은 해성고등학교와 원광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미술대학원을 마쳤다.

총15회의 개인전을 비롯해 1988년부터 해마다 3인전을 개최하며 주목을 받고 있다.

이외에 국제전 및 단체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2008년부터 전북예술계 수장인 전북예총 회장직을 비롯해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전주비빔밥축제조직위원장, 전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장, 풍남문화법인 이사장, 한국전통문화전당 이사 등을 지내고 있으며, 대통령 소속 사회통합추진위 전북도의장, KBS 시청자 위원, 전북미술대전 대회장, 전북미술관 건립추진위원, 전주한지문화축제 총감독 등을 역임했다.

각종 미술대회 심사위원 활동도 활발하다.

무등미술대전, 춘향미술대전, 대한민국 미술대전, 전북문예진흥기금, 전북미술품, 전북공예품공모전, 전북미술대전 등에서 심사를 맡기도 했다.

이외에도 쿼터그룹 고문, 아트퍼스널리티 대표, 목정문화재단 이사, 전주세계소리축제 부위원장, 세계서예비엔날레 조직위원, 전북도립미술관 운영위원, 군산대 겸임교수, 전주법원 시민법사위원 등을 지내고 있다.

1996년 반영미술상, 2002년 전주시 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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