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봉헌 변호사

나이 먹어가는 것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시간 여유가 생겨 틈틈이 고전을 읽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좋은 점은 그 고전을 이제 까지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자기 나름의 시각으로 음미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청년 시절의 독서가 백지 상태에서 지식을 주입하는 무미건조한 것이라면,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에서의 독서는 자신만의 주관을 가지고  흥미진진하게 어떨 때는 “맞아”하고 무릎을 치기도 하고 어떨 때는 “글쎄”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읽는 재미가 있다.

이번에 플라톤이 지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은 때에는 처음부터 변호사의 시각에서 글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 이제 법조인이 생래의 “나”보다 더 진짜 “나”이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났다.

우여곡절 끝에 남들보다 한 5년 출발이 늦었지만 28년 동안 그 물에서 살았으니 그럴 만 하다.

 변호사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결국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 형이 집행되었으니 실패한 변론이다.

왜 그러한 결과가 초래되었을까? 죄가 컸나?, 아니면 재판제도에 문제가 있었나? 그렇지도 않다면 변론에서 실패한 것인가? 인류의 위대한 스승에게 감히 불경스러운 그런 질문이 쇄도하는 나 자신이 민망하지만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왕지사 그렇게 된 것이니 하나씩 검토해 보기로 했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된 죄의 요지는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국가가 신봉하는 신들을 신봉하지 않고 다이몬이라는 색다른 것을 신봉하기 때문에 죄인이다”는 것이다.

당시 아테네는 끊임없이 이웃국가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자원인 청년들의 정신상태를 중시할 수  밖에 없었고  국가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신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신봉이 국가의 기본질서이므로 청년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신봉하는 신이 아닌 다른 신을 신봉하는 것은 아테네 시민들로서는 중죄로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법정은 각 부족에서 50명 씩 추첨에 의하여 선출된 500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어, 판결은 다수결에 의하여 결정되었는데  영미의 배심원 제도나 우리나라의 국민참여재판과 유사한 제도이므로 재판제도가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면 변론에 문제가 있었을까? 변론도 재판관과 재판받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 중요하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지자라고 여기고 있고 스스로도 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 가서 당신은 지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분명이 알게 하려고 힘썼는데 그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중상을 받았으며 이 것이 재판에서 가장 크게 불리한 영향을 미칠 터인데 짧은 변론으로 해명하기 어렵다’는 변명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 다음에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될수록 훌륭하게 하고 사려 깊은 자가 되게 하는 일에 마음을 쓰라고 가르치는 것은 칭찬받고 포상 받아야 할 일이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그 일을 그만두지는 않겠으며, 자신이 믿는 다이몬도 신이므로 신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고 변명하였다.

전문적인 지식과 오랜 재판경험을 쌓은 직업법관과 달리, 평범한 일반인으로 구성된 재판관에 의한 재판의 경우에는 특히 감정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사실 이러한 변론은 최악의 변론이다.

재판받는 사람이 재판관을 신뢰하지  않으면 재판관으로서는 모멸감을 갖게 되어 당연히 좋지 못한 결과를 자초한다.

더구나 아테네는 BC 431-404에 걸친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배한 후 극심한 혼란과 갈등상태에 있어서 시민들도 열등감에 빠져 있고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심리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 본인이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점을 사과하고 청년들에게 도덕적 사람이 되라고 자신이 교육했지만 그것이 성실함이나 애국심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다이몬도 제우스 신 아래에 있는 부신일 뿐이라고 변론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렇다면 280표가 유죄, 220표가 유죄였으므로  30표 이상이 다른 쪽에 던져 저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는 일상적 삶에 매몰된 속인인 필자의 짧은 생각일 뿐이다.

책을 덮으면, “될수록 정신을 훌륭하게 할 것을 마음 쓰고, 그보다 먼저 혹은 그와 같은 정도로 신체나 돈에 관해서 마음을 써서는 안 된다.

‘돈’으로부터 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덕’에 의하여 돈이나 그 밖의 모든 것이,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인간을 위하여 좋은 것이 된다.” 는 말씀이 마음 속 깊이 새겨진다.

목숨을 바치며 지킨 진리이기 때문에 그 울림이 더 깊고 더 크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변론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제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정의에 어긋나는 양보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양보하지 않으면 곧 파멸하리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는 결연한 태도로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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