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희 전북현대 감독을 만나다

▲ 강희대제, 재활공장 공장장 등 거창한 별명보다 팬들과 가깝게 느껴지고 친근한 봉동이장이라는 별명이 제일 마음에 든다며 환하게 웃는 전북현대 최강희 감독./김현표기자

최근 언론에 보도된 최강희 감독에 대한 기사다.
내용을 이렇다.
전북현대 최강희 감독이 K리그 통산 감독 최다 우승 기록에 도전한다.
지난 2005년 전북에 부임한 최 감독은 2009년 창단 15년 만에 전북에 K리그 첫 우승을 안겼다.
이후 2011년, 2014년 우승을 이끌며 K리그 통산 3회 우승을 기록했다.
따라서 최강희 감독이 올해 K리그를 우승할 경우 4회 우승이란 대기록을 쓰게 된다.
현재로선 기록 경신 가능성은 매우 높은 편이다.
현재 전북은 K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자력우승까지 남은 승점은 3점이다.
최강희 감독의 도전은 이뿐 만이 아니다.
지난 7월 26일 수원전 승리로 전북 현대에서만 154승을 달성해 역대 K리그 단일팀 최다승 기록을 경신했다.
이후에도 기록은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 K리그 역대 감독 통산 최다승 승리 3위에 올라 있다.
역대 감독 최다승 기록은 김정남 감독의 210승, 김호 감독의 207승이다.
현재 최강희 감독은 160승을 기록하며 차범근 전 수원삼성 감독의 157승을 넘어선 지 오래다.
하지만 최강희 감독이 주목받는 이유는 비단 성적 때문은 아니다.
선수들이 믿고 따라올 수 있는 지도력에 거침없는 언변, 이웃 아저씨 같은 푸근한 외모 등이 한 몫 하기 때문이다.
완주군 봉동 율소리에 있는 전북현대 클럽하우스를 찾았다.
K리그가 한창이라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지만 방문자를 환한 웃음으로 맞는다.
/편집자주

 



“별4개를 달기 위한 마지막 마무리다.

올해는 일찌감치 선두를 달리는 바람에 선두 독주체제가 됐다.

창단된 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팀은 안정됐고, 우승DNA가 선수들에게 주입된 결과다.

후반 좋은 결과를 위한 마무리를 하겠다.”

자리에 앉자마자 K리그 성적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그만큼 팀 성적은 중요하고 또 자신이 해야 할 일, 존재이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북현대가 올해 우승을 차지하면 네 번째 우승이다.

우승기념으로 가슴에 별 4개를 달 수 있다.

K리그 각 팀마다 경기력이 평준화된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다.

어려운 매 경기를 이겨간 것이 후반기까지 힘이 된 셈이다.

하지만 최강희 감독 입장에선 아쉬움도 있다.

올해 우승을 한다면 이제는 전체적 팀 정비에 나설 예정이다.

앞만 보고 달려오는 바람에 내실안정화에 신경을 덜 썼다는 것이다.

“전북은 이제 우승에 도전해야 하는 팀이 됐다.

선수들이 잘 따라준 결과다.

올해 우승을 한다면 경기내용이나 질적향상에 신경을 쓸 예정이다.

조직운영, 경기운영 등 전체적인 면을 보지 못한 채 달려왔지만 뒤를 돌아볼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의 말처럼 전북현대는 이른바 ‘닥공’이란 경기운영을 했다.

닥치고 공격이란 이 용어는 전북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지만 반면 일방적 경기운영을 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상대팀 경기분석이나 비디오분석 등을 전혀 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전북현대만의 일방적 경기를 했다.

도전적 ‘닥공’ 스타일은 성공했지만 팀의 내부를 추스릴 여유는 없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앞만 보고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명문구단으로서 면모를 갖추었으니 그에 걸맞는 내적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게 최 감독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지난 10여 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 감독이 전북현대 사령탑을 맡은 지 올해로 10년이 됐다.

강산이 한 번 변할 시기다.

최근에 완공된 클럽하우스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초창기 어려웠던 과거가 떠오른다.

존재감이 약했던 팀을 강하게 만들어야 했던 의무감과 해결방법이 항상 머리에 맴돌았다.

‘과연 우리가 K리그에서 별을 달 수 있을까.’ 부정적 생각만이 초창기 강하게 지배했다.

하지만 부정과 긍정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부정적 생각을 멀리하고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K리그에서 별을 달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긍정은 자신감을 낳고 팀 상승세에 큰 도움이 됐다.

선수들에게 우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했고 현재의 결과를 낳게 됐다.

긍정적 마인드는 좋은 선수 영입보다 훨씬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리그우승은 토너먼트대회와 달리 팀내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으면 매우 힘들다.

선수들 모두 헌신하고 자신감 넘치는 분위기가 있어야 무너지지 않게 된다.

지금은 내가 아닌 누가 오더라도 이기는 분위기, 이기는 정신문화가 만들어져 있다.”

경기도 양평 촌구석 출신이다.

3남1녀의 셋째로 집안의 돌연변이 취급을 당했다.

공부 잘한 형들은 일찌감치 서울로 유학을 갔고 여동생과 시골에서 지냈다.

공부는 남의 일이었다.

학교보다 논두렁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일명 ‘논두렁 축구’를 하면서 훗날 축구선수의 기초체력을 쌓았다.

숙제를 해 본적이 없어 ‘훗날 너 뭐가 될래?’란 질문을 받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말썽장이였던 그가 국가대표 축구감독, 전북현대 감독으로 이름을 날릴 줄을. 가끔 고향을 방문하면 ‘말썽장이 꼬마가 봉동 이장이 돼서 왔다.

이장이 얼마나 높은 지 다들 알죠?’라며 금의환향 대접을 받는다.

축구 인생은 순탄치는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갔다.

마침 전학한 학교에 축구부가 창단됐다.

논두렁 축구로 다져진 그는 축구부에 들어가 7개 대회에 출전해 6개 대회를 우승하는 쾌거를 이뤘다.

본격적으로 축구꿈을 키운 게 이 때였다.

하지만 곧바로 인생의 암흑기가 찾아온다.

축구부가 없는 중학교로 진학한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 때문이다.

책을 본 적이 없는 학생이 공부를 잘 할리 없었다.

처음 본 시험에서 58명 중 57등을 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반에서 5등 안에 들면 큰 선물을 준다는 아버지와 약속도 지킬 수 없었다.

죽어라 암기과목을 외우고 중학교 마지막 시험에서 58명 중 7등을 한 게 최고였다.

‘공부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한 것도 이 때였다.

축구부가 있는 한양공고에 진학했지만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학생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감독의 무관심 속에 타 학교로 전학한 후 축구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훨씬 늦게 입문한 셈이다.

고등학교 시절, 철저하게 무명선수 시절을 보냈다.

정식단계를 밟은 것도 아니고 엘리트 코스를 거친 것도 아닌 그에게 사회는 무관심했다.

실업팀과 군 생활도 어려운 시기의 연속이었다.

국가대표가 됐지만 그의 나이 29살 때였다.

동기들이 은퇴할 시기 대표선수가 돼 34살까지 활동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인생이다.

주위의 도움이 컸고 운도 따랐기 때문이다.

이때문인지 2011년도엔 국가대표 감독직도 맡았다.

전북현대가 팀 창단후 처음으로 챔피언이 된 해였다.

당시 국가대표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조광래 감독이 강제로 물러나고 후임 감독은 ‘독이 든 성배’를 마시는 자리였다.

분위기도 좋지 않았지만 체질상 국가대표 감독은 맞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응집해서 보여줘야 한다.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전체적 그림을 그리는 그로선 힘겨울 과정일 수도 있었다.

지난 2003~4년 국가대표 코치를 맡으면서도 절실히 깨달았다.

계속 고사를 했지만 감독직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국가대표 감독 일년 반은 극과 극의 경험을 가져왔다.

대한민국은 우연곡절 끝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그 과정에 욕도 많이 먹었다.

개인적으론 만신창이가 됐다.

수장이 없는 전북현대는 끝없이 추락했다.

잊고 싶은 기억 중 하나란 말이 실감된다.

별명이 많다.

강희대제, 재활공장장, 봉동이장 등이다.

강희대제처럼 거창한 것도 좋고, 슬럼프에 빠진 선수를 전성기로 돌려놓은 재활공장장도 그를 대변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봉동이장이 으뜸이다.

본인도 제일 맘에 들어한다.

팬들과 친근감을 표현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는 행동에서 나왔다.

“봉동은 읍이기 때문에 사실 이장은 맞는 말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봉동읍장이 옳다.

내 인상이 강하다보니 팬들이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해 선물을 했다.

너무 맘에 들어 공식석상에서도 스스로 봉동이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무표정의 대명사다.

웬만해선 웃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사람인지라 나도 웃는다’고 항변하지만 무표정한 얼굴은이동국과의 애틋한 사이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정도다.

축구를 통해 인생을 살아가는 두 사나이들이 하나로 마음이 통한 결과다.

선수와 지도자는 믿음과 신뢰가 기본이다.

이동국과는 수년 전부터 믿음과 신뢰가 쌓인 상태다.

또 36살이란 나이를 잊을 정도로 제 역할을 해 주는 이동국이 최 감독 입장에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게란 생각도 든다.

‘아직도 전성기처럼 보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이유다.

그의 지도자론도 마찬가지다.

선수들 기량을 향상하고 선진축구 기술을 습득하는 차원이 아니다.

긍정적 마인드에서 비롯된 행복이다.

감독이 행복하면 선수들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선수나 코치 시절은 최선을 다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지도자를 해보니 긍정적이고 행복한 게 우선이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선수들도 불행해진다.

선수 스스로 행복하면 감독이 필요없게 된다.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전북현대에 몸담으면서 느낀 결과다.

비록 경기에 지더라도 선수들에게 긍정적 사고를 심으려 노력한다.

승리에 대한 애절함을 넘어서면 즐거움이 생기고, 승리를 저절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이동국, 김상식 등 나이 먹은 선수들을 우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뿐 아니라 즐거운 선수생활을 할 수 있는 이정표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일과 가정은 병행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최 감독도 자유롭진 못하다.

리그가 본격 진행되면 가족 얼굴을 보기 힘들다.

아내와 딸이 있지만 세 명이 함께 식사를 한 지 오래다.

심지어 현관문 비밀번호를 잊어버릴 정도다.

가끔 집에 가면 하숙생 취급을 받는다고 하소연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이다.

내년이면 결혼 30주년을 맞는다.

아내에게 항상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두 가지를 다 잘할 생각이 있다면 도둑 심보다.

빵점짜리 아빠에 남편이다.

그래도 떨어져 사니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유지되는 것 같다.

은퇴를 하게 되면 봉동에 집을 장만하고 묏자리도 이곳에 두고 싶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만큼 봉동에서 마무리하고 싶다.”

그의 길은 탄탄대로다.

10년 넘게 전북현대를 이끌었고 명문구단 반열에 올라섰다.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어렵게 입을 뗐다.

“팬들과 구단이 결정한다.

감독에게 명예롭고 아름다운 은퇴는 없다.

단지 계약기간 동안 최선을 다할 뿐이다.

스카우트 제의는 몇 번 있었지만 전북에 있는 만큼 그럴 생각 전혀 없다.

전북은 내 지도자 인생과 함께 한 팀이다.

언젠가는 관두겠지만 전북에 몸담고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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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 감독이 걸어온 길

 

전북현대 최강희 감독은 대기만성형이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일을 처리하는 성격도 한 몫 한다.

경기 양평군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용두초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대광중학교로 진학했지만 축구부가 없어 ‘인생의 암흑기’를 보내고 한양공고 축구부에 들어간다.

하지만 정식 코스를 밟지 않은 그는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1년 유급을 결정하고 남대문중학교에서 기초를 다시 배운 뒤 우신고로 진학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한일은행에서 실업팀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4년 현대(현 울산현대)가 창단되면서 프로에 입단한다.

뛰어난 실력을 아니지만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던 그는 1988년 29살이란 늦은 나이에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이전까지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그로선 새로운 전기가 된 것이다.

이후 88서울올림픽, 88아시안컵, 90이탈리아 월드컵 등에서 태극마크를 달았고, 33세인 1992년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훌쩍 떠난 1년 간의 독일 유학생활을 마치고 1995년 수원이 창단되면서 김호 감독과 함께 수석코치를 7년 간 맡게 된다.

2002년부터 3년 동안 아시아게임 등 대표팀 코치로도 활동했다.

2005년 전북현대 감독을 맡으면서 그 해 FA컵 우승, 2006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했다.

이 여세를 모아 2009년, 2011년, 2014년 창단 통산 세 번의 K리그 우승을 전북에 안겼다.

올해 우승을 차지하면 네 번의 우승트로피를 들게 돼 명실상부 명문구단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2011년~2013년엔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월드컵 8회 본선진출의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2009 쏘나타 K리그 올해의 감독상, 헬로 풋볼 팬즈 어워즈 베스트 코치, 2011년 현대오일뱅크 K리그 대상 감독상, 2014년 현대오일뱅크 K리그 대상 최우수감독상 등을 수상했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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