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식 저자의 '일본천황은 백제 무왕의 자손' 백제원정군파견-미륵사 금판-팔각릉 조성등 두 나라간 연결고리 통해 새 관점 제시

서기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수도 부여가 함락되자 당시 일본의 여왕이던 제명천황은 서둘러 백제부흥군을 편성하고 이를 지휘하기 위해 서쪽 끝인 후쿠오카까지 달려오다가 길에서 숨진다.

그 아들인 중대형황자는 어머니의 장례도 치르지 않고 일본 함대를 백제로 보냈으나 수 백 척의 함대는 백강 입구에서 궤멸된다.

백강전투에서 부흥군을 모두 잃은 일본은 한반도로 향한 모든 문을 닫아걸고 왕의 호칭도 천황으로 바꾸고 자신들의 역사도 새롭게 편찬하면서 독자생존을 강행한다.

한국과 일본 고대사의 최대의 수수께끼라 할 이 백제부흥군의 파견과 궤멸,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일본의 태도. 일본 여왕은 왜 그랬을까? 왜 나라를 건 모험을 감행했을까?

일본인들도 궁금해 한다.

한 전직 언론인이 이 문제에 집요하게 파고들어 마침내 그 비밀을 밝혀냈다.

그 비밀이 드러난 계기는 묘하게도 2009년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탑 지하에서 발견된 한 장의 금판이다.

미륵사의 서탑에 사리를 봉안한 사연을 적은 이 금판에서 우리가 전혀 몰랐던 백제 무왕의 왕후인 사택왕후가 등장하고 이 탑이 639년에 세워졌다는 절대연대가 나온다.

그런데 이 무렵 일본에서도 왕(서명천황)이 백제천 옆에 궁궐을 세우고 절을 만들고 탑을 세운 것으로 나오는데, 그 때가 익산의 미륵사 서탑을 세운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백제에서는 대란이 일어나 왕의 어머니와 왕자, 공주들이 추방된다.

이 후 일본에서 천황부터 증손자에 이르는 천황들의 무덤이 팔각이라는 장식을 두른, 전혀 다른 무덤이 조성된다.

저자는 각각 별개로 생각되던 이런 일련의 사건 속에서 의자왕의 집권, 왕의 어머니의 추방, 팔각릉의 조성 등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어, 익산 미륵사 서탑에 사리를 봉안한 사택왕후와 그 아들, 공주 등이 의자왕에게 밀려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이들이 일본에 가서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호족 소아(蘇我 소가)가 씨를 대신해서 일본의 왕권을 차지한 이후에 그들이 자신들의 출신을 장엄화하기 위해 팔각릉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무덤을 쓴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것은 곧 현 일본의 천황가가 바로 백제 무왕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저자 이동식은 KBS에서 문화와 역사방면 전문기자로서 활약한 언론인으로서 1990년대 우리나라에서 활발하게 이뤄진 김해 대성동, 양동의 발굴, 미사리와 하남 위례성 관련 발굴 등 주요 역사현장을 취재 보도했으며 일본의 임나일본부 주장의 허구성을 밝힌 ‘임나일본부는 없었다’와 우리나라 방송사상 최초로 중국 실크로드를 답사해 제작한 ‘서역기행 5천 킬로’ 등 역사 다큐멘터리의 제작과 방영을 담당한 역사 전문기자였다.

2009년 미륵사 서탑 사리봉안기의 발굴기사, 그리고 그 뒤에 2010년부터 일본에서 쏟아진 팔각 천황릉의 확정 등의 움직임을 추적해 7세기에서 8세기 한일 두 나라의 역사가 이렇게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처음으로 알리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미륵사 서탑에서 나온 금판 한 장이 이렇게 한일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였다.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백제에서의 팔각문화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일본의 팔각릉이 백제와 이렇게 연결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제 백제의 역사가 올바르게 복원되면 일본의 역사도 제대로 살릴 수 있고 그 속에서 우리의 고대역사도 되찾을 수 있다고.출판사는 “이번 저서는 어둠에 휩싸인 한일 고대사, 한일 관계사에 새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더 많은 관련연구를 불러일으키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윤가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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