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진 글로벌문화협회장   

21C 세계 각 국가들이 문화관광산업을 활성화하여야 국가와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문화관광콘텐츠 발굴에 힘을 쏟고 있다.

흑석골에는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발굴을 해 주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못해 급기야 지역주민들이 삐칠 지경이라고 한다.

학산이 품고 있는 흑석골은 전주시에서 가장 낙후 된 곳이기에 청정 자연과 흑석골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은 보광제 둘레길을 조성하고 있지만 1960년대만 해도 보광제 넘어 지게지고 나무하러가던 길목이었다, 올 5월20일에 흑석골에 상수도가 들어와 상수도 물을 마시게 되었다.

전주시민들은 이 지역이 얼마나 늦은 지역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지요?

1970년~80년도 환경개발에 대한 국민적 관심으로 한지생산이 집단적으로 생산된 이곳이 전주시 팔복동으로 집단 이주하는 아픔을 맛보기도 하였으나 팔복동에서 한지 생산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

당시 흑석골이 왜 한지 생산단지가 되었는지를 확인해 보자. 이곳의 물, 즉 수질이 한지 생산에 가장 적합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팔복동으로 집단 이주 대책보다는 오, 폐수관과 연결하여 흑석골에서 한지가 지금까지 생산 될 수 있도록 하였다면 흑석골은 한지의 명소가 되었을 것이다.

수묵화의 세계적 거장 남천 송수남화백이 흑석골에서 태어나 흑석골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이곳에 자신이 그렸던 고향의 풍경이 전시되어 후학들과 미술 애호가들이 자신의 세계와 같이하길 원했던 곳 이기도 하다.

평론가들은 서양화를 전공한 남천이 한국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고향 전주의 예향의 피가 흐르는 영향이 컷을 것이라 한다.

고향에 두고 온 자연에서 남천 선생은 유년시절 한벽당 아래 전주천에서 멱을 감다 소용돌이 물살에 휩싸여 죽을 고비를 넘겼다며 물에서 놀기를 싫어한 이유가 아닐까 한다.

대야에 찬물을 떠서 발을 담고 부채를 부치면서 더위를 이기는 나름의 피서법을 고집하였는데 현대는 에어콘과 선풍기로 더위를 이긴다며 정취를 아쉬워하기도 했다.

흑석골은 후백제의 외성으로 흑석사가 화재로 타다 남은 기둥을 김제 금산사 대웅전 기둥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흑석사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흑석사의 미륵석불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지역 주민들은 알고 있다.

동네에서 공동으로 사용한 우물터도 있고, 마을의 안녕과 재앙을 물리친다는 당산나무와 당산제를 17년째이나 실제는 훨씬 이전부터 지내오고 있었다.

당산제를 지내면서 마을의 재앙이 언제부터 사라지고 없었다.

어떤 재앙이 있었는지는 주민들이 알고 있다.

흑석골을 사랑하는 전주시민들은 흑석골에 남천미술관, 한지박물관, 체험관, 생산단지조성, 흑석사와 미륵석불 발굴, 당산나무를 전라북도보호수로 지정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며 한옥마을-남천교 아래 캠핑촌, 텐트촌(독립군을 지킴)-서학예술촌-초록바위(천주교, 동학농민지도자)순교터, 동학농민기념관-흑석골(스토리텔링)-보광제 둘레길-남고산성-만경대(포은 정몽주시비)-남고사(남고모종 재현)-관성묘-무형유산원-한옥마을 관광벨트화로 머무르는 전주관광을 창조한다면 흑석골은 새로운 명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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