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한해 대상 논픽션 다큐멘터리 전쟁-해방-권력투쟁-대량살육 주제 다뤄

이안 부루마 - ‘0년: 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


세상에 ‘0년’은 없다.

기원전과 기원후를 나누는 예수 탄생은 ‘서기 1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0년’의 저자는 1945년이 ‘0년(원년)’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현대세계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0년=1945년’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인류 문명을 새로 재건하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해로, 글로벌 차원의 세계체제 전환이 일어난 때이기도 하다.

이 책은 1945년이라는 한 해를 대상으로 세계사를 써내려간 독특한 역사서이자 논픽션 다큐멘터리다.

0년의 이야기는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한다.

‘나치 지옥의 불구덩이’가 유럽을 덮칠 때 네덜란드에서 독일로 끌려갔다가 종전 직후 연합국에게 처형될 뻔했지만 영어를 아는 러시아인 사관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아 귀향한 저자의 아버지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것은 단연코 특별한 게 아니라 전 세계의 뭇 사람이 겪은 전쟁 체험이었다.

아버지의 개인사에 대한 저자의 연민은 ‘1945년의 세계사’에 대한 지적 탐구의 열정이 됐고 세계적 변혁에 대한 공시적, 국제적인 관점으로 뻗어나갔다.

이 책은 저자 아버지의 개인사적 휴먼 드라마에서 시작하지만 ‘전후의 세계사’로 뻗어나간다.

종전 뒤에 따라온 해방 콤플렉스, 기아와 보복의 만연, 성적 해방, 귀향, 매국노 처벌, 인민재판식 숙청, 전범 재판의 불완전한 정의, 평화와 인권에 대한 희망, 야만의 문명화 등과 같은 결정적 주제들을 비범하게 다뤄나간다.

현대세계의 등장에는 사악한 권력 투쟁이 뒤따랐다.

스탈린에 의한 유럽의 분단은 전쟁이 남긴 가장 지독한 상처였다.

세계의 거대 도시들이 폐허가 됐고, 인구는 대량 살육당했으며, 뿔뿔이 흩어지고 기아에 허덕였다.

가혹한 보복이 대규모로 가해졌고, 보복을 위한 명분이 쌓이면서 훨씬 더한 공포가 예고됐다.

연합군도 점령지 여성을 성폭행했다.

독일과 일본 전쟁포로는 국가적 패배라는 사실만으로도 버거웠을 테지만 동족의 경멸, 증오와 맞닥뜨려야 했다.

재앙을 초래한 전쟁의 책임이 있다는 것, 오만한 전사로 국가 위에 군림하더니 비굴한 패자로 돌아왔다는 냉대와 무시의 대상이 되었다.

평화가 찾아오자 사람들은 군인들이 전시 폭력에서 범죄로 신속히 갈아타는 것을 목격하면서 제국 군대에 대한 자부심은 더욱 손상되었다.

이 책은 체험자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논픽션으로 패전을 당한 독일과 일본만이 아니라 유럽 각지, 미국, 동남아, 중국, 중동 등 세계 각지, 각국과 민족이 겪은 ‘0년’을,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기술 등을 통해 풀어나간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 전문가인 만큼 한국의 위안부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의 지면을 할애한다.

그는 “일본군 치하의 국가에서 납치된, 이른바 위안부는 사실 일본군 공창의 성노예”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아베 내각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 책임은 고사하고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조차 명확히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와중에 2015년 12월 한일 정부는 기괴한 위안부 문제 합의를 했다.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하고,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로 상호 비판하는 것을 자제한다는 약속을 일본에 해주었다.

2015년 9월 아베 총리는 집단자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11개 안보법안을 통과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70년 만에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저자는 아직도 세계에서는 전란이 끊이지 않아 유엔이 기능 부전에 빠지는 경향이 있고, 일본에서도 평화주의를 과거의 유물로 작심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으며, ‘0년’의 소득인 일본의 평화주의는 일본을 정복했던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속해 있었다고 일갈한다.

“70년이 지난 지금조차도 여태껏 가슴이 아파 읽기조차 어려운 이 책은 오늘날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악의 힘에 의한 일상적 공포를 심도 있게 반영하고 있다”고 한 브라이언 우어카트 전 유엔 사무차장의 말마따나 파시즘과 군국주의 유령이 배회할 때 떠올려야 할 것은 1945년이다.

/윤가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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