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로수로 유혹한 회문산감로수로 유혹한 회문산 유광찬(전주교육대학교 전 총장) 전주시 남부순환도로를 지나 산길을 넘어 내려가다 보면 촌락의 모정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골마을이 정겹게 눈에 들어온다.

구이 들녘을 지나 옥정호의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듯 놓여있는 다리를 건너다보면 눈앞에 물과 어우러진 조각배들이 소근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운암 산 능선을 넘어서니 도로에 아직도 잔설이 남아있다.

강진에서 잠깐 자연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휴식을 취했다.

차 밖에서 느껴보는 겨울 향기는 차가움이 따스함의 향기를 어디론가 사라지게 한 것 같다.

아직도 가냘프게 메달려 있는 몇 조각의 잎사귀들이 차가운 바람에 힘겹게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회문산 휴양림으로 올라가는 길은 차가 지나간 자국을 제외하고는 산야가 하얗게 눈으로 덮여 은막을 둘러놓은 것 같았다.

매표소 앞마당에 주차를 하고, 노령문을 지나 출렁다리를 건널 때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니, 청강수와 같은 눈이 녹은 물이 소리없이 흘러 웅덩이를 이루었는데, 맑은 웅덩이에 풍덩 몸을 던져 세속의 찌꺼기를 한꺼번에 씻어내고픈 충동을 느꼈다.

얼어붙은 계단을 조심조심 긴장하며, 전망대에 오르니 전망대 바닥에는 50cm 정도나 되는 눈이 쌓여 있었다.

바람에 흩날려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설의와 같다.

둘레에는 의자가 있어 앉아서 주위 경관을 둘러보니 나무에 내린 눈도 나뭇가지를 이불처럼 덮어주고 있으며, 나무 밑으로 내린 깨끗한 눈도 나무의 밑둥을 감싸주어 나무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방한복을 입힌 것 같은 느낌이다.

나무들이 따뜻함을 알리기라도 하듯 나뭇가지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전망대를 내려와 숲속 수련장으로 향하고 있는데 얼마 안 가서 길에 발자국이 전혀 없는 새하얀 도로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가히 25cm 정도는 될 것 같다.

주변에 있는 나무들은 하얀 솜이불을 덮고 있어 추위에 떨기는커녕 더워서 부채를 부치듯, 자기의 온기를 발산하려고 온힘을 다하여 쭉쭉 뻣어 있는 것 같다.

이게 눈 덮인 산야의 원초적 풍경이로세........ 아무도 걷지 않은 처녀지를 밟는 마음은 실로 나의 마음과 몸을 달구기 시작하였다.

첫날밤과 같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즐기며, 한발짝 한발짝 살포시 발길을 옮기며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나의 심장은 자연의 멋에 취해 쿵쿵 소리가 들릴 정도로 요동을 치고 있었다.

눈 덮인 회문산은 자연의 순순함 그 자체를 나에게 선보이는 것 같았다.

그 주위로 흐르는 시냇물소리가 교향곡처럼 울려 퍼져서, 그 음율을 감상하며 산야에 쌓인 눈들도, 그 멋에 흠뻑 취해 있는 것 같다.

이런 광경을 보며, 긴장과 즐거움이 요동쳐서 인지 목이 말라왔다.

무릎까지 빠지는 야영장 안에 있는 식수대로 가보았으나 얼어붙어 물은 나오지 않았다.

큰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조그만 시냇가에서 맑은 물이 졸졸졸 흘러 내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니 그리 기쁠 수가 없었다.

나의 갈증을 식혀줄 감로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조심조심 내려가 두 손으로 물을 받으니, 손이 아려왔지만, 그 차가운 물을 받아 목을 축이니, 그 물 맛은 꿀물처럼 달콤했다.

몇 번을 반복하여 먹었더니, 갈증이 완전히 풀렸다.

자연의 치유는 이렇게도 빠르고 완벽하단 말인가? 회문산 계곡의 물맛은 원효대사가 유학길에 올랐던, 밤에 그렇게도 맛있게 마셨던 ‘골탕’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눈에 뒤덮인 산야와 생명의 시냇물이 흐르는 회문산의 풍경을 즐기며 도달한 곳은 회문봉(837m)이다.

좋은 것을 모두 보고 올라온 고지는 그 나름대로의 멋과 맛을 느끼게 하는데 손색이 없었다.

무릎까지 빠지며 등산을 해본 경험은 오늘이 처음이다.

기껏 해봐야 운동화가 묻힐 정도였는데 오늘은 그의 5~6배는 충분히 되고도 남을 것이다.

정상도 처녀지였다.

우리의 마음을 담아 새하얀 눈 위에 눈 사진을 찍었다.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엎드려 눈과 코가 선명하게 눈 위에 흔적을 남기고, 뒤로 들어 누워서 나의 뒷모습도 찍어 놓았다.

신성한 자연을 훼손시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정말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좌측으로 보이는 사방댐은 여름철에 아주 인기가 많은 물놀이 공간이 될 것 같이 느껴졌다.

물은 얼어 있지만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인다.

속없는, 실없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듯이 말이다.

조금 더 내려오니 빨치산 사령부가 동굴형태로 재현되어 있었다.

동굴 속을 들어가 보니 부상당한 자가 치료받는 모습, 총기를 손질하는 모습, 옷을 궤메는 모습 등을 마네킹으로 만들어 놓아, 보는 이가 실감나게 하였다.

지리산 칠선계곡을 갈 때 만나게 되는 빨치산 마네킹 보다 훨씬 더 현실감이 높다.

인생을 계절에 비유할 때, 25세까지는 봄, 50세까지는 여름, 75세까지는 가을, 75세 이후는 겨울이라 하는데, 요즘은 100세 시대이므로 75세가 넘어도 꿈이 있고, 희망이 있으면, 봄이나 여름, 가을보다도 더 아름답고 싱그러움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현실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커다란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즉,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철따라 좋은 열매를 맺고, 모든 일이 만사형통하는 인생을 가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