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고해'···다산이 회잡을 맞아 정리한 '자찬묘지명' 스스로에게 하는 고해성사 담아

정약용은 ‘다산학’이라고 지칭되는 빼어난 학문적 성취를 거둔 유학자이자, 성호 이익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실학자다.

화성 축조에 참여한 공학자였고, 정조에게 상방검을 받은 비밀공작원이기도 했다.

법의학자이자 수사관이었으며, 40대에 이미 정승에까지 오른 관료였다.

또는 천주교 배교자로, 혹은 독실한 천주교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는 격정이자 혼돈이었으며, 18세기 조선 그 자체였다.

정약용은 일흔다섯 해를 살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정약용의 얼굴은 30대, 정조와 함께 활동했던 극히 짧은 시기에만 집중되어 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조차 중년 무렵에 이뤄진 것이다.

정약용이 세상을 떠난 지는 올해로 세 갑자(180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천 년 전 사람인 것처럼 자신이 남긴 수많은 흔적들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

그래서 정약용은 지금까지도 해석이 분분한 ‘문제적 인간’이고, 수다쟁이 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지만 우리는 그의 삶 가운데 지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정약용은 회갑을 맞아 자신의 고해와 같은 삶을 스스로의 목소리로 정리해 남겼다.

‘자찬묘지명’이다.

‘정약용의 고해’(출판사 추수밭)는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 정약용 본인이 직접 들려주는 정약용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자찬묘지명은 스스로 쓴 자신의 묘지명을 가리킨다.

묘지명은 친인척이나 지인들이 써주는 것이 관례다.

그래서 자찬묘지명은 묘하다.

자서전도, 유언도 아니지만 그 모두를 포함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정약용의 호는 ‘다산’이다.

강진에서 그가 거했던 곳의 이름 또한 다산초당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에서는 다산초당에서의 시간이 그저 지나가는 식으로만 짧게 언급됐다.

그가 자찬묘지명을 썼을 때가 예순이었으니 다산초당에서의 시간은 그의 인생에서 3분의 1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서전이나 마찬가지인 글에서 무심한 척 그때를 흘려보낸다.

대신 아주 짧은 기간이었던 정조와의 교류를 비중 있게 다룬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직시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대개는 그 무게에 짓눌려서 적당히 외면하게 된다.

정약용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다음, 반생 가까이 흘려보낸 삶이 억울하고 또 헛돈 생은 아니었을지 의심이 갔을 것이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삶의 의미를 간절하게 찾으면서도 그런 의심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반생 가까이 갇혀 지냈던 자신의 삶에 용서를 구하며 다독인다.

정약용은 정조와의 추억을 비중 있게 다루지만, 그렇다고 남은 삶을 버티기 위해 자신의 가장 찬란했던 과거와 그리운 친구들을 소환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임금님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동화처럼 끝내지 않고, 방대한 저술활동을 집요하게 소개하며 그 이후에도 꾸역꾸역 나아가야 하는 자신의 삶을 긍정했다.

남은 생에 최선을 다하고자 어떤 원망도 냉소도 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우리 모두는 후회 없는 삶을 꿈꾸지만, 삶이란 뒤돌아 하는 후회의 연속이 쌓이고 쌓인 것이다.

그리고 늙어간다는 것은 이러한 미련을 인정하고, 자신의 역사와 화해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삶에 있어 스스로에 대한 죄인이고, 또 다른 정약용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용기 있게 직시한 다음 스스로에게 털어 넣고 용서를 구하는 고백과, 오늘까지 잘 버텨왔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다독이는 화해가 아닐까 한다.

마치 환갑의 정약용처럼 말이다.

/윤가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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