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문

/목사

대중매체인 매스컴이 사회에 주는 영향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그 효과가 크다.

대체적으로 매스컴은 모든 사람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매체이고 그에 대한 정당성으로 통해 통제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대의 변화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정보전달체계에 따라 언론의 역할이 과거에 비해 분산된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도 그 영향력은 무시하기 어렵다.

각 가정에 보급되어있는 가장 보편적인 매체인 TV는 시청각을 통해 보여주는 리얼리티로 인해 효과적인 정보전달을 만들고 있고 그 영향력은 그만큼 더 크게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정보전달 매체의 다양화로 인해 어느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지 정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자 얼마만큼의 단점이 되고 있다.

정보란 공개되어서 유익한 것이 있는가 하면 특정한 정보에 대해서는 특정 집단에 대해 보호를 받아야 할 정보도 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TV는 각 프로그램에 따라 시청할 수 있는 나이를 구분하고 방영에 앞서 주의를 환기시켜 준다.

그런데 뉴스만큼은 시청할 수 있는 나이를 규제하지 않고 방영한다.

과연 ‘뉴스는 연령제한 없이 볼 수 있는 시간일까?’하는 생각을 할 때 스스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을 느낀다.

보편적으로 뉴스의 내용을 보면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적으로 결코 유익이 없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때론 보면서도 충격을 금치 못하는 내용들이 있고 사회 지도자들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수치스러움을 느낄 때도 있어서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별로 유익이 없는 내용들이 많다.

어떤 내용은 아이들이 있다면 눈을 가리고 싶을 만큼 경악스러운 사건도 있다.

물론 국가의 위상을 높여주는 희망적인 뉴스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사건 자체가 가지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다.

최근 사회면은 계속해서 터지고 있는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학대와 함께 죽음에 이르는 사건이 주요뉴스를 차지하고 있다.

최초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제기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인간이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있어도 그 개인이 유일적(唯一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하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으로 개인은 사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사회공동체 안에 한 개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개체로서 공동체 안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

사회는 작게는 가정 공동체에서 크게는 국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그러한 공동체 안에는 묵시적 약속을 가지거나 서로가 지켜야할 명시적 약속을 만들어 공동체의 질서와 안전 그리고 각 개인이 가지게 되는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약속 안에 책임을 가지는 것이 곧 사회적 책임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가지게 되는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이 가지는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자신의 삶에 진정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한 역할에 따른 책임은 명시적인 것도 있지만 묵시적인 것으로 가장 소중하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이 바로 가족공동체 안에서의 책임이라 생각한다.

가족공동체 안에서 가지는 역할에 따른 책임은 강제적인 것이 아닌데도 자발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최근에 이러한 가족공동체 안에서의 책임이 깨지는 것으로 인해 안타까운 불행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어 안타까움이 있다.

부모는 가족공동체 안에서 자녀에게 사랑을 통해 양육할 책임을 가진다.

자녀는 그러한 부모의 사랑의 관심을 받으며 한 인격체로서 성장하게 된다.

즉 자녀들은 세상에 태어날 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녀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고 그 책임으로 인해 결혼 후 자녀 출산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한다.

자녀는 단지 생물학적 원리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파생된 존재가 절대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랑받을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는 그에 따른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부모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의무라기보다 자발적 책임이다.

그런데 최근에 무책임한 부모들로 인해 끊임없이 경악할 뉴스가 나오고 있다.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한결같이 분노하고 불행을 당한 어린아이에게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동물들의 생활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동물들도 본능적으로 자녀를 돌보는 성향을 가진 것을 볼 수 있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단장’(斷腸)의 슬픔은 원숭이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중국 남북조시대 진나라의 군사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배에 태우고 가자, 어미 원숭이가 슬피 울며 배를 쫓아왔다. 백여 리를 가서 배가 포구에 닿자 어미 원숭이가 배 안으로 뛰어들더니, 쓰러져 죽었다. 어미 원숭이를 해부했더니 새끼를 걱정한 나머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원숭이의 지극한 모성애를 상징하는 고사이다.

뉴스를 통해 보여주는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학대를 통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사건의 보도를 보는 아이들이 자신의 부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뉴스 속에 나오는 사건의 부모들에 대해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이제 TV 뉴스 시간이 되면 성년이 되지 않은 자녀들에게 시청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과연 자녀들에게 어른일까?

어른으로서 자격과 사회적 의미, 책임 등을 알고 행동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나이가 어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인격이 어른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각자가 가지는 사회적 책임을 다할 때 훨씬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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