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미의 통치' 시대 부정성 미학에 기초한 현대의 美 기준 비판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아름답고 느낄까.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문학과지성사)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물음표를 던진다.

오늘날 통용되는 아름다움은 현실의 부정성에서 벗어난 긍정적 유토피아다.

오늘날의 긍정사회에서는 나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고통을 주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여겨진다.

저자 한병철은 제프 쿤스로 대표되는 현대 예술과 스마트폰, 브라질리언 왁싱, 위생 강박, 셀카 등을 하나의 현상으로 묶는다.

아름다움은 일체의 부정성이 제거된 채 매끄럽게 다듬어져 나에게 만족을 주는 대상, 향락적인 향유 대상으로 축소돼 버렸다고 꼬집는다.

이로써 미적인 것은 모조리 주체의 자기긍정에만 기여할 뿐, 주체를 진정 뒤흔들지도, 부정하지도 않다.

심지어 추함 또한 매끄러워진다.

악마적인 것, 섬뜩한 것, 끔찍한 것 역시 공포와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부정성을 상실한 채 소비와 향유의 공식에 맞춰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털을 제거한 몸이나 스마트폰의 터치스크린 등 매끄러운 표면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현대 미의 기준은 한병철의 눈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그는 진정 아름다운 것, 진정한 예술작품이란 폭로될 수 없는 비밀, 은폐된 것, 은유, 부정성을 내포한 것이라고 본다.

부정성을 가진 것이 아름답다는 한병철의 주장은 ‘미는 병이다’까지 나아간다.

한병철은 모든 제작물들과 환경이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 맞게 개조되어가는 ‘미의 통치’의 시대가 되었지만, 오로지 긍정성의 미학에 지배되고 있다는 점에서 ‘미가 철폐되어가는 시대’로 간주한다.

그는 블랑쇼, 보들레르, 릴케, 아도르노, 벤야민, 바르트 등을 ‘부정성의 미학’의 증인들로 소환한다.

또한 칸트와 헤겔의 미학에서 소비와 도구화에 대한 저항, 타자에 대한 존중 등의 요소를 찾아낸다.

이런 부정성의 미학에 기초해 한병철은 나르시시즘적인 경향,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문화, 피상적인 긍정성에 집착하는 소통 양상 등 현대의 현상들을 두루 비판한다.

여러 사상가의 이론을 간명하게 짚어내 연결하는 이 책은 독자들을 흥미롭고도 깊은 사유로 점점 나아가게 해준다.

오늘날의 미에서는 아주 많은 자극들이 생산된다.

바로 이러한 자극과 흥분의 홍수 속에서 미가 사라진다.

대상에 대한 관조적 거리가 불가능해지고, 대상은 소비에 내맡겨진다.

미용산업은 몸을 성적 대상으로 만들고, 소비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몸을 착취한다.

소비문화는 미를 점점 더 자극과 흥분의 도식에 종속시킨다.

훌륭한 예술작품의 기준도 우리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 되고 그 판매 가격이 그 작품의 가치로 환산된다.

그러나 진정한 미는 소비될 수 없다.

“소비와 미는 서로를 배척한다. 미는 향유하라고, 소유하라고 유혹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는 관조적인 머무르기로 초대한다.”

아름다움은 자본주의와 결코 화합할 수 없다는 것이 한병철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아름다움에는 감각적 만족을 넘어서서 우리를 대상과 자아에 대한, 결말을 알 수 없는 열린 성찰로 이끄는 힘이 있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관찰자를 타격하여 쓰러뜨리는 것’ ‘나를 뒤흔들고 파헤치고, 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아름다운 대상을 자기확인과 만족, 향유의 도구로 삼기를 그만두고, 자신에게 충격과 전율과 불안과 고통을 안겨주며 상처를 입히는 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주체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열어놓을 수 있게 된다.

결국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의 구원’은 곧 ‘타자의 구원’이다.

/윤가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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