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었던 다윗에 대한 많은 분량의 기록이 있다.

다윗에 대해서는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일화를 통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성경에는 다윗이 자신의 범죄를 완전범죄로 만들기 위한 사건의 기록이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더욱 강력하게 이루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보내 암몬과 전쟁을 할 때 자신의 왕궁 높은 곳에서 궁 밖을 바라보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여인의 아름다움에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 여인과 동침하여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전장에 나가있는 장수의 아내였다.

다윗은 그 장수를 불러 한동안 아내와 함께 쉬도록 하였으나 그 장수는 전쟁 중에 자신만 쉴 수 없다고 하여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다.

다윗은 어쩔 수 없이 그 장수를 다시 전장에 보내면서 그의 손에 편지를 주어 군대장관 요압에게 보내었다.

그 편지에는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 선두에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우리아를 죽게 하라는 기록이었다.

우리아는 그로인해 전쟁에 나아가 전사하게 되었다.

그 후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왕궁으로 불러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이 사건은 다윗의 계략에 따라 완전범죄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의 충성된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나아가 한 사건을 통해 다윗의 범죄를 드러낸다.

나단은 성중에 가축을 많이 가진 부자 한 사람과 암양 한 마리가 재산의 전부인 가난한 사람이 있는데 어느 날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와 자신의 가축을 잡지 않고 가난한 자의 한 마리 양을 빼앗아 나그네를 위해 잡은 사건의 처리를 의뢰한다.

다윗은 사건의 개요를 듣고 크게 분노하였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나단이 다윗에게 말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다윗의 완전범죄로 끝날 수 있었던 사건은 이로 인해 드러나게 되었다.

최근에 섬마을 교사에 대한 성폭행과 연예인들의 성폭행 사건 등 성범죄로 인한 사건들로 사람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청년 실업문제로 취직이 어려운 상황에서 단기간의 기간제 근무에 오지인 섬에서의 근무인데도 지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겪게 된 성폭행 사건은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더욱이 사건을 사전에 공모한 정황을 알게 하는 내용들이 더욱 분노를 만들게 한다.

범인 중 한 사람은 과거의 숨겨진 성폭행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어 완전범죄로 끝날 수 있을 수 있었던 사건이 드러나게 되었다.

사건의 범인으로 구속된 자들을 TV뉴스를 통해 보면서 그들의 생각이 어떨까를 생각해 보았다.

과연 그들이 자신의 범죄를 진정으로 후회하고 스스로 반성하며 괴로워할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운이 없어서 걸렸을 뿐이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과 후회보다는 좀 더 신중하게 실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할지도 모른다.

잘못에 대한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자신들의 범행을 완전범죄로 끝내고자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어떤 범죄들은 수사에 걸리지 않고 말 그대로 완전범죄로 종결된 사건들로 다수에 이를 것이다.

그러한 사건의 범죄자는 자신의 범죄를 잘못으로 여기고 후회하기보다는 완전범죄로 인해 쾌재로 여길지도 모른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정당화시키는 의식이 같은 범죄를 반복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의 죄나 불의에 대한 인식이 타인의 잘못에 자신의 잘못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정당화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죄나 불의는 그 크기에 관계없이 잘못된 거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앞서 기록한 다윗의 범죄처럼 사람들은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지적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해지는 경향을 가진다.

범죄는 드러나는 것으로 잘못이 되고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은 누가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잘못인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양진전(楊震傳)〉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양진은 후한의 안제 때의 사람으로 박학하고 청렴결백하여 ‘관서의 공자’라 불렀다.

그런 그가 동래군의 태수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는 도중에 창읍에서 묵게 되었다.

저녁 늦게 창읍의 현령인 왕밀이 찾아왔다.

왕밀은 양진이 형주자사로 있을 때, 그의 학식을 높이 사 무재로 뽑아 준 사람이었다.

이런 왕밀을 양진은 반갑게 맞이하였다.

지나온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왕밀은 소매 속에서 황금 열 근을 꺼내어 내밀었다.

양진이 자신에게 베풀어 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준비한 것이었다.

양진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나는 옛 지인으로서 자네의 학식과 인물도 기억하네. 그런데 자네는 나를 잊은 것 같군."

"아닙니다. 이건 뇌물이 아니라 지난날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뿐입니다."

"자네가 영진하여 나라를 위하여 진력하는 것이 나에 대한 보답이네."

"지금은 밤중이고, 방안에는 태수님과 저뿐입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네가 알고, 내가 알지 않는가![天知地知子知我知]"

왕밀은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두산백과) 완전범죄란 없다.

다윗은 나단의 지적에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크게 후회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가진 성경의 기록이 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잘못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있고 그러한 회개를 통해 새로운 인격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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