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숙 언론인

차창 밖 누른 벼들이 정겨움으로 다가오고, 추석 후 연말로 내달리는 마음을 잠시 느긋하게 해준다.

올해 여름 유례없던 폭염은 많은 국민을 힘들게 했지만, 벼농사 풍년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쌀농사가 너무 잘 돼 농민들이 오히려 수심에 잠겼다.

넘쳐나는 쌀로 인해 쌀값이 곤두박질치고 있기 때문이다.

4년째 '풍년의 역설'이 되풀이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추정하는 올해 쌀 생산량은 420만 t이다.

벼 재배 면적은 줄었지만 다수확 품종, 재배기술 향상, 좋은 기상 조건에다 태풍까지 비켜가면서 수확량이 늘었다.

쌀 생산은 늘어났지만, 소비는 줄어 쌀값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우리 국민의 하루 평균 쌀 소비량은 172.4g으로 2014년보다 3.3% 줄었다.

밥 한 공기에 들어가는 쌀이 100∼120g인 점을 고려하면 하루에 공깃밥 2그릇도 먹지 않는 셈이다.

1980년 132㎏이었던 1인당 쌀 소비량은 지난해 63㎏으로 줄었다.

1인당 쌀 소비량은 매년 약 2㎏씩 감소한다.

올해 햅쌀 가격은 80㎏ 1가마당 13만8천 원으로 지난해보다 20% 이상 하락했다.

농민은 올해 쌀값이 25년 전인 1991년 수준이라며, 물가상승을 고려하면 쌀값이 25년 전보다 더 싸다고 허탈해한다.

쌀 재고는 역대 최고인 200만 t에 이른다.

최근 지인이 일본 오사카에 있는 친지를 방문했다가 최고급 햅쌀 3㎏을 선물 받아 돌아왔다.

포대 상단을 리본으로 묶은 포장이 일본 상품답게 깔끔하고 고급스럽다.

압력 밥솥으로 지은 밥알이 투명하고 반짝반짝 윤기가 흐른다.

한 입 맛보니 쫀득하고 달착지근한 게 혀끝에서 가슴을 거쳐 뇌까지 살살 녹이는 것 같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가 따뜻한 일본 쌀의 명성이 헛되지 않다 싶다.

한국 쌀의 맛도 일본 쌀 못지않다는 평론부터 한국 쌀도 포장과 홍보를 잘하면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성 기대까지 갑론을박이 식탁 위를 오갔다.

마침 마트에 갔다가 햅쌀 4㎏ 포장이 '1+1' 행사로 판매되기에 얼른 집었다.

역시 압력 밥솥으로 지으니 '이런 맛도 있구나!' 싶다.

조금 과장하면 '천상의 맛'이 따로 없다.

쌀에 대한 한국인 특유의 감수성 탓인지 경외심마저 든다.

오사카 쌀 못지않은 맛임은 물론이다.

같이 식사를 하시던 어르신들이 갓 도정한 햅쌀은 원래 맛이 이처럼 좋다고 하신다.

쌀은 연구 결과 필수 아미노산, 식이섬유, 미네랄 등 좋은 영양 성분이 많아 콜레스테롤 저하, 항산화, 혈압조절, 당뇨와 치매 예방, 돌연변이 및 암 억제 등 다양한 기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쌀만 요령 있게 잘 먹어도 질병 예방 효과가 작지 않을 것 같다.

반면 정제 과정에서 영양소가 대거 빠져나가는 밀가루는 소화되기 어렵고 장 건강을 악화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설탕, 지방, 소금과 결합하면 중독성을 가져 비만을 일으키는 '공공의 적'으로 몰리기도 한다.

오죽하면 밀가루만 끊어도 살이 빠진다고 할까. 밀가루에 들어있는 단백질 성분인 글루텐은 장내 곰팡이의 먹이가 돼 유산균 서식을 방해하고 면역력을 떨어뜨린다고 한다.

가려움, 가스 유발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90% 이상이 수입되는 밀가루는 유통 과정에서 변질을 막기 위해 사용되는 방부제, 보존제, 농약 범벅이라는 주장도 있다.

밀가루보다 쌀이 영양, 위생적으로 훨씬 우수한데 왜 밀가루 소비는 급증하고, 쌀 소비는 감소할까. 우선 밀가루는 쌀보다 가공이 훨씬 쉽다.

주변에서 보듯 밀가루 가공식품은 다양한 과자, 빵, 케이크 등 무궁무진하다.

설탕을 섞어 단맛을 내고 기름에 튀겨 고소하게 만들고 소금을 넣어 입맛을 돋우는 상품이 널렸다.

여기다 무엇보다 밀가루는 쌀보다 훨씬 싸다.

밀은 쌀과 비교되지 않게 저가로 대량 재배되기 때문이다.

세계 3대 곡물인 쌀, 밀, 보리 중 밀의 생산 및 소비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르다.

유발 하라리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에서 지구 곳곳으로 퍼진 밀을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진화한 식물로 꼽았다.

북아메리카 대초원에는 1만 년 전 밀이 한 포기도 없었지만, 지금은 수백 ㎢에 밀 외 다른 식물을 보기 어려울 정도다.

하라리는 인간이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밀이 인간을 길들였다고 역설한다.

쌀 가공식품도 늘어나고 있긴 하다.

쌀 떡볶이, 쌀국수, 쌀과자는 기본이고 쌀 소시지, 쌀 시리얼, 누룽지 플레이크, 쌀 튀김가루, 쌀 요구르트, 쌀 케이크 등 다양하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는 쌀 생산 증가와 소비 감소로 인한 쌀값 하락을 막기에 역부족이다.

쌀 농가의 어려움은 지속하고, 쌀농사를 지원하는 재정 부담이 가중한다.

쌀에만 적용되는 생산장려책을 손질해 쌀 생산을 감소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쌀 농가 소득 감소를 고려할 때 쉽지 않다.

한국의 힘은 '밥심'이라고 할 만큼 쌀은 우리 생활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정황근 신임 농촌진흥청장은 밀가루를 대체할 쌀가루 개발에 쌀 공급 과잉 해소의 성패를 걸겠다고 밝혔다.

밀가루를 대체할 수 있으면 떡, 국수, 과자를 만드는 수준을 넘어서 쌀 빵, 쌀라면 등을 널리 보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큰 수해를 입은 북한에 인도적 차원에서 쌀을 지원함으로써 공급 과잉을 해소하자는 제안이 나오고 있다.

'풍년의 역설'을 피해갈 수 있는 묘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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