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 전주 YWCA 회장  

얼마 전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 전북이 낳은 섬진강 시인인 김용택 시인의 인터뷰 방송을 들은 적이 있다.

시 읽기 좋은 계절, 가을에 맞춰 신간 시집을 발간한 시인에게 독특한 시집 제목에 담긴 의미며, 시인이 된 이유 등에 대해 묻고 나누는 모처럼 따뜻한 방송이었다.

시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힘들고 어려워서 저녁이면 제각기 집으로 울고 들어 올 것 같아서 돌아 갈 따뜻한 집을 생각하며 시집을 냈다고 했다.

시집 제목은 ‘울고 들어 온 너에게’란다.

라디오 방송은 이미 다른 코너로 넘어갔는데도 내 머리는 정지된 채 제목이 계속 맴맴 거렸다.

울고 들어 온 너에게... 아들이 고등학생 시절, 운동선수인 녀석이 갑자기 운동을 그만 두겠다고 통보를 하고는 얼마간 힘겨루기를 한 적이 있다.

운동선수이니 대회도 나가고 메달도 따야 좋은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데 막무가내로 운동을 안 하겠다고 하니 사회복지 공부를 했다는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때 전주YWCA이사였던 나는 체면불구하고 Y가 운영하고 있는 청소년상담실, 지금의 전주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를 노크하여 아들의 이 엄청난 변덕을 상담하게 되었다.

운동선수들은 학교수업에 모두 참여할 수 없고, 오전수업을 듣다가 운동을 하러 가야하는게 다반사다.

그러니 수업은 수업대로 뒤쳐지고, 친구들과는 깊이 사귈 수도, 놀 수도 없어 외로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훈련은 얼마나 엄격하고 지독한 지 ‘차라리 공부를 하는 게 쉽겠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운동을 그만 두겠다고 한 것이다.

세상에, 자식들은 이런 이야기를 부모에게는 어째서 차근차근 하지 못하는 걸까? 부모들은 또 왜 자식들의 가슴 속 이야기를 그 때 그때 듣지 못하고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지경까지 가야하는 걸까? 사회복지를 공부할 때 인간 욕구와 사회복지의 개념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욕구(need)란 인간이 처한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충족되지 않거나 결핍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다 좋은 것을 가지려는 요구(want)와는 다른 개념’이라고 했다.

즉 욕구는 클라이언트에게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요구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있어 자녀는 영원한 클라이언트가 아니던가? 부모는 자녀의 욕구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자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으려 해야 한다.

상담을 받은 후 자녀의 입장에서가 아닌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주려하지는 않았는지, 또한 부모의 요구를 마치 자녀의 요구인 양 들어주고 있다고 착각한 것은 아닌지 되물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11월,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십 수년간 나름 위기를 넘기며 열심히 살아 온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또 거대한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요즈음, 우리는 부모라는 이름으로 그 작은 얼굴을, 축 쳐진 어깨를 그저 따뜻한 두 손으로 감싸주어야 한다.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엉덩이 밑으로 두 손 넣고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되작거리다 보면 손도 마음도 따뜻해진다. 그러면 나는 꽝꽝 언 들을 헤매다 들어온 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

김용택 시인이 시에서 말한 것처럼 말이다.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