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임금이 아니다
대통령은 임금이 아니다
  • 추왕훈
  • 승인 2016.11.2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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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왕훈  

"이 자리에 계신 주요 잠룡들께서 각 당에서 국민의 뜻에 부합하는 당론이 조속히 마련될 수 있도록 당내에서 적극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당부 말씀드리고요…진상 조사와 정국 수습까지는 당을 중심으로 협력이 이뤄져야 하고 그 책임이 성공적으로 수행됐을 때 국가 미래, 비전을 중심으로 한 우리 잠룡들의 경쟁이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난 20일 '비상시국 정치회의'에서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가 한 발언 가운데 일부다.

심 대표가 두 번 사용한 '잠룡(潛龍)'이라는 말은 물론 '잠재적 대선 후보'를 의미할 것이다.

이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물속에 잠겨 있는 용'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왕조 시대에는 더욱 구체적인 의미가 따로 있었으니 '앞으로 임금이 될 인물'이라는 뜻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잠룡'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심 대표는 자신도 '잠룡'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민중운동'을 한 심 대표가 설마 자신을 '임금이 될 사람'으로 생각할 리는 없겠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배경에는 절대 왕권에 가까운 막강한 대통령의 권력과 구중궁궐을 연상케 할 만큼 은밀하고 음험한 권력의 작동 방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폐해를 없애야 한다면서 많은 이들이 헌법 개정과 그를 통한 권력구조 개편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법과 제도의 문제일 뿐인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부지불식 간에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국가원수를 왕조 시대의 임금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무의식이 언어생활을 통해 드러난 하나의 예가 '잠룡'이라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잠룡'이 '잠'을 떼고 '용'이 된 후 그 얼굴은 '용안'이 되고 그가 앉는 자리는 '용상'이 되는 건가.  선거철만 되면 자주 등장하는 '대권(大權)'이라는 말 역시 민주공화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느낌이 든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대권'에 대해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인 국가의 원수가 국토와 국민을 통치하는 헌법상의 권한"이라는 설명을 달았지만, 막상 헌법을 보면 이 용어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는다.

이 말 역시 임금의 권력을 이르는 말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잠룡'과 마찬가지로 '대권'이라는 말도 여러 차례 나온다.

예컨대 "벼슬로 상을 주고, 형벌로 위엄을 베푸는 것은 인주(人主·임금)의 대권이고, 아래 사람에게 옮겨 줄 수 없는 것입니다"(태종 9년 5월 30일 사헌부의 상소문)라는 식이다.

근대적 의미에서 '대권'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이 말을 '천황(일왕)의 절대권력'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제국주의 시대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 세계대백과사전 인터넷판은 '대권'에 대해 "대일본제국 헌법하에서 국법상 천황에 속해 있던 권능. 광의로는 통치권의 전 범위로 입법권·사법권을 포함하며 협의로는 의회의 동의나 독립기관에 위임하지 않고 천황이 독자적으로 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학자들이 정립한 '대통령의 비상대권'이라는 개념 역시 제국주의 일본의 헌법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이 측근을 주요 공직에 임명하는 등의 방법으로 국정의 장악력을 높이려 할 때 '친정 체제의 강화'라는 표현을 흔히 쓰곤 한다.

'친정(親政)'이란 '임금이 나라의 정사를 직접 돌봄'이라는 뜻이다.

국왕이 어리거나 질병 등의 사정으로 통치할 수 없을 때 누군가 왕권을 대리하는 '섭정(攝政)'에 대비된다.

'친정'이건 '섭정'이건 모두 왕정을 전제로 한 용어여서 대통령제하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말이다.

한때 박근혜 대통령과 남동생 박지만 EG 회장의 이름에 따라다녔던 '영애(令愛)'나 '영식(令息)'은 임금과 관련된 용어는 아니지만, '윗사람의 아들·딸을 높여 이르는 말'이라는 점에서 역시 신분제 사회의 유산이다.

지금도 흔히 사용되는 '영부인(令夫人)'이라는 용어는 국가원수의 부인에 대한 예우라는 차원에서 필요성이 인정될지 몰라도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는 민주 사회에서 대통령의 자식이라고 해서 특별한 존칭을 붙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전·현직 대통령이 별세했을 때 사용하는 '서거(逝去)'라는 말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붕어(崩御)' 등과 같이 임금의 사망을 특정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 역시 명백한 높임말이다.

대통령을 지낸 이가 숨을 거두었다고 해서 그 죽음을 특별히 높이 불러야 하는가. 현대사회에서도 종교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소천(召天·기독교)', '선종(善終·천주교)', '입적(入寂·불교)' 등 특정한 종교에서 죽음을 이르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고인의 종교를 존중해 준다는 의미 이상으로 높임의 뜻은 없다고 봐야 한다.

대통령의 살해를 두고 '시해(弑害)'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이 말은 명백히 '임금을 죽임'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일정 기간 행사할 수 있는 '제일의 공직자'일 뿐 임금이나 황제가 아니다.

비바람을 몰고 다니는 구름 위의 용일 수도 없다.

법이 인정하는 예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연인으로서는 그 역시 누구의 위에도 있지 않은 한 사람의 시민일 뿐이다.

쉽지는 않더라도 대통령 자신이나 그 주변 인사들, 그리고 국민 모두가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대통령을 임금에 비유하거나 대통령이 만인 위의 존재라는 취지를 담고 있는 모든 용어를 말하지도, 글로 쓰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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