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왕훈  

많은 역사가가 실재의 사건으로 여기는 트로이 전쟁은 당시의 서양 문명권 전체가 연루된, 요즘 기준으로 치자면 '세계대전'이었다.

기원전 1200년 전후의 일이었다고 하니 역사적 사실과 신화적 허구가 뒤섞여 전해 내려오는 것은 당연하다.

후대의 여러 문학작품과 역사서가 설명하는 이 전쟁의 발단은 신들의 거처 올림포스 산에서 열린 결혼 축하연 자리에 던져진 황금사과였다.

  제우스신은 자신의 손자이자 영웅인 펠레우스와 바다의 님프 테티스(둘은 뒷날 트로이 전쟁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낳는다)의 결혼식에 올림포스의 모든 신과 여신을 초대했다.

그러나 누구나 꺼리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은 제외됐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에리스는 복수하기 위해 연회장에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고 적힌 황금사과를 던졌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여신들 가운데 제우스의 아내이며 신들의 여왕인 헤라와 '지혜의 여신' 아테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저마다 사과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여신들로부터 사과의 진정한 주인을 판정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 난처해진 제우스는 이 난제를 파리스에게 떠넘겨 버린다.

트로이 왕자로 태어났으나 기구한 운명으로 인해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양치기로 살아가던 인물이었다.

제우스는 예전에 파리스가 황소로 변한 '전쟁의 신' 아레스와의 소싸움에서 자신의 소가 패하자 약속한 대로 보물을 선선히 내줬다는 사실을 들면서 그의 정직성을 믿을 만하다는 점을 파리스에게 심판을 맡긴 이유로 내세웠다.

황금사과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세 여신은 파리스가 선뜻 결정을 못 하자 그에게 각자 뇌물 공세를 퍼부었다.

헤라는 유럽과 아시아를 모두 주겠다고 했고 아테나는 지혜와 전쟁의 기술을 갖춘 최고의 전사가 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파리스는 결국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얻게 해 주겠다고 한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 줬다.

    파리스가 얻은 여인은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였다.

트로이의 왕자로서 신분을 되찾은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을 얻어 헬레네를 트로이로 데려가는 데 성공했다.

버전에 따라 파리스가 헬레네를 납치했다는 설명도 있고 헬레네를 유혹해 함께 도피했다는 서술도 있지만, 전체 맥락으로 볼 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졸지에 아내를 빼앗긴 데 격분한 메넬라오스는 그리스 동맹국들에 헬레네를 되찾아오기 위한 대(對) 트로이 전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고 이에 응한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의 거대한 전쟁이 시작됐다.

황금사과를 놓고 겨룬 세 여신 가운데 헤라와 아테나는 당연히 그리스 편이 됐고 아프로디테는 트로이를 지원했다.

여기에 올림포스 신들 사이의 친소관계에 따라 거의 모든 신이 가담하면서 고대판 세계대전은 또한 '신들의 전쟁'으로 비화했다.

  그리스 신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라고 할 이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국회에 던진 제안이 에리스가 던진 황금사과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황금사과는 '불화의 사과'로 불리기도 한다.

자신의 진퇴를 국회의 논의 결과에 맡긴다고 한 박 대통령의 제안은 여야 간에, 야당 간에, 여당 내 계파 간에 복잡다단한 의견 충돌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불화의 사과'로 부를 만하다.

박 대통령의 진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차기 대선의 유불리가 갈린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이 던진 제안을 '다음 대통령에게'라고 쓰인 황금사과로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박 대통령이 에리스와 같은 복수의 마음을 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박근혜 판 불화의 사과' 역시 '적진의 혼란과 분열'을 목표로 삼았으리라는 추정은 가능하지 싶다.

박 대통령의 '진퇴 일임' 제안 직후 야당들이 우왕좌왕했던 모습이나 새누리당 '비박' 계열의 탄핵 의지가 약해진 점을 보면 어느 정도는 그 목표를 달성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박 대통령을 에리스에 비유한다면 지금의 현실에서 세 여신은, 또 제우스는 누구이고 파리스는 누구인지 선뜻 떠올리기는 어렵다.

다만, 어느 신화나 그렇듯 '에리스의 황금사과' 이야기 역시 인간사와 세상의 이치에 관한 우의라는 점에서 나름의 교훈을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신들과 여신들은 불화를 야기하기 위해 던져진 사과를 되돌려 주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특히 세 여신은 탐욕에 눈이 멀어 에리스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고 말았다.

굳이 사과의 주인을 가려야 했다면 신다운 선의와 아량, 그리고 지혜로 합의점을 찾는 것이 최선이었겠지만, 그것이 안 됐을 때는 당연히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심판을 해야 했다.

제우스가 신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의 판단을 인간에 불과한 파리스에게 맡긴 것이야말로 결코 신이 해서는 안 될 못난 짓이었다.

  파리스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욕정이 이끄는 대로 결정을 내린 것을 탓하기는 어렵다.

그는 나약한 갈대와도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예정된 운명이었다.

곧 태어날 아들이 트로이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는 예언을 믿은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는 파리스가 태어나자마자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살해명령을 받은 부하가 파리스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산속에 버리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그가 트로이 멸망의 빌미가 될 것이라는 예언은 결국 실현됐다.

이렇게 보면 에리스가 올림포스 산의 연회장에 황금사과를 던진 바로 그 순간에 모든 것은 예정돼 있었던 셈이다.

    신화는 신화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인간의 미래는 열려 있고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고 문명사회의 인간들은 믿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제안이 '에리스의 사과'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해도 신화에서처럼 운명이 이끄는 비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현대인들, 특히 정치권력자들에게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 있다는 점은 지적해 두는 것이 좋겠다.

민심을 거스르는 권력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운명 말이다.

주말마다 서울 심장부의 광장을 메우는 촛불과 함성은 이 운명을 일깨우는 '현대판 신탁(神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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