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교육개발원 대표 박경옥

전주한옥마을에 600만의 관광객이 몰려오고 있다.

한옥마을의 풍경은 서울 명동, 인사동 거리를 방불케 할 정도로 관광객이 많다.

관광객들은 전주 명소를 구석구석 관광하기 보다는 한옥마을 일대를 스치듯 지나면서 곧장 비빔밥이나 콩나물국밥을 먹거나 제과점에 가서 초코파이를 사려고 줄을 선다.

전주는 맛의 고장이면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고장이다.

전주 한옥마을의 중심도로 ‘태조로’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태조 이성계의 근원과 조선왕조의 시조임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의 발자취가 녹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진 박물관은 한양에서 태조 임금님 어진을 모셔올 때 어진행렬의 모형 전시실이 있다.

어진행렬의 웅장함과 조선왕조 위엄이 숨결까지 느껴진다.

태조 어진이 모셔진 경기전에는 어진박물관과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었던 현재의 전주사고가 있다.

조선왕조 역대 왕의 시대적 정치, 경제, 문화 기록물의 산실 전주 사고가 그 증거로 남아있다.

전주사고 내부에 들어서면 안의, 손홍록 할아버지의 나라사랑 마음과 사고에 보관했던 실록을 옮기는 긴박했던 임진왜란 당시 상황이 그려진다.

어려운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 하려고 하지 않고 나라의 보물을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용기와 실천의 결과가 전주의 힘이고 미래를 디자인 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되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되어 500년 역사를 지켜오는 과정에서 26대 고종황제는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의 국가 원수의 명칭 ‘황제’ ‘천황’에 대등함을 보여주기 위해 1897년 조선을 ‘광무’로 연호를 바꾸고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은 외부의 강력한 세력들에 대비하여 이미지 변신으로 노력하지만 세계사적 흐름에 밀려오는 열강의 침략에 힘없이 나라의 주권을 잃는다.

1910년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대한제국도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전주에도 일제 침략의 산실 한옥마을이 남아있다.

현재 전주 풍남문을 중심으로 주변은 전주성 내부와 외부로 나뉘어 성내에는 일본인이 살고 백성들은 성 밖으로 몰아냈다.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 성 밖에 집을 짓기 시작하여 전주 한옥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전주는 조선왕조 역사의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를 담고 있는 도시다.

태조 이성계 임금님의 뿌리의 터요. 어진이 보존 된 역사적 배경이 한옥마을 텃밭 ‘씨앗’이라면 전주사고는 조선왕조의 ‘열매’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적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하다.

그뿐인가 씨앗이 열매를 맺고 발효된 곳, 전주의 보석처럼 소중한 우리 역사의 꽃, ‘승광재’는 전주 역사의 발효현장이다.

承光齋 (대한제국의 광무를 이어간다는 뜻의 승광재)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손 이석님이 기거하고 계신다.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지이며, 조선왕조와 깊은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찾아서 인문학적 정신을 담은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개발을 통하여 전주를 찾는 관광객이 진한 울림으로 남는 전주로 기억되도록 해야 한다.

하루 즐기고 떠나는 곳이 아닌 하룻밤, 이틀밤 머물고 싶게 하는 ‘도시 디자인’이 요구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주에 담긴 역사를 전문가의 시각으로 촘촘하게 구성하여 책 속에 잠자고 있는 글들을 깨워야 한다.

어린이, 청소년, 시민, 예술인에게 ‘끼’의 옷을 입혀 보기를 바란다.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안의, 손홍록 할아버지들의 긴박했던 순간을 극화하여 체험하고, 마지막 황손의 왕자님 시절 생생한 이야기를 판소리, 뮤지컬, 오페라 공연으로 관람한다면 관광객의 마음에 남는 강도는 다르다.

전주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엔진은 역사다.

역사는 에너지의 근원이다.

관광객에게 전주 음식의 맛과 역사 인문학 감동의 울림으로 기억되는 도시, 전주를 알려야 전주의 미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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